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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14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9151)은 언어에 대한 관념에서 플라톤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1953)에서 '표현'이라는 관념을 비판했다. 표현은 추상미술, 특히 추상표현주의에서는 매우 본질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표현이란 의미를 표현하는 의도라는 관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의도는 그것이 말이나 시각을 통해 표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의미에 대한 의지인데,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적이고 타인들은 알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자신은 즉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마음의 삶에 대한 그림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각자가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적 의미라는 관념 대신에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그것의 용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삶의 형식"에 .. 2019. 7. 25.
1966년a 마르셀 뒤샹, 「주어진」 ▲ 마르셀 뒤샹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주어진」 설치를 완성한다. 점점 커져 가던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사후에 공개된 이 새로운 작품과 더불어 절정에 이른다. 1960년 제스퍼 존스는 "뒤샹과 더불어 언어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뒤샹의 「큰 유리」는 그가 작품을 시각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지적 경험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라고 썼다. 핍쇼 작품 제작을 위한 이 세 개의 '패러다임' 혹은 모델은 60년대 초반 미국의 문맥에 확실히 정착했다. 레디메이드는 도처에 널려 있었고 개념상 팝아트의 보호막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플럭서스의 작업에도 철저히 스며들었다. 지표는 존스의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났고 로버트 모리스와 브루스 나우먼이 제작한 신체 주형물에.. 2019. 7. 24.
[이론] 미술의 스펙터클화 90년대 문화 전반에서 건축과 디자인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됐다. 이런 현상은 초기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건축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비생활의 많은 측면, 즉 패션과 판매, 기업 브랜드와 도시 재개발 등에서 넘쳐나는 디자인과 디스플레이에 의해 더 부추겨지고 견고해졌다. 디자인과 디스플레이에서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전시 기획과 미술관 건축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즉 모든 대형 전시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 구상되는 듯하며, 모든 새로운 미술관은 스펙터클한 '총체예술'로 구상되는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구겐하임 미술관과 헤어조그와 드 뫼롱이 개축한 템스 강변의 테이트 모던은 이제 그 자체가 관광명소가 됐다. 다른 대규모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전후 미술.. 2019. 7. 24.
1964년b 앤디 워홀 ▲ 앤디 워홀의 「13명의 지명 수배 1호」가 뉴욕세계박람회 미국관 전면에 일시적으로 설치된다. 그는 명예(fame)가 유명세(celebrity) 아래, 아우라가 성적 매력 아래, 카리스마가 과장 광고 아래 포섭돼 버리는 상품-이미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드러내고 개척했다. 워홀은 자신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녹음기, 영화와 비디오카메라를 항상 켜 놓는 그 세계 내부의 첩자였다. 비판인가, 무관심인가?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와 광고의 모사본이 깨끗하고 명료한 선을 특징으로 한다면 워홀은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에서 치명적 총상을 입을 1968년 사이에 이르는 기간이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들은.. 2019.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