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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50년대 노트5

1956년 인디펜던트 그룹, 리처드 해밀턴 ▲ 영국 팝아트의 선구자인 인디펜던트 그룹이 전후 시기의 미술, 과학, 기술, 제품 디자인, 대중문화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이들의 성과는 런던에서 열린 전시 《이것이 내일이다》에서 절정을 이룬다. 엄밀히 말해 인디펜던트 그룹은 예술 운동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던 스터디 그룹에 가깝다.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끈 사람은 건축 문화 미술의 평론가들이었다. 이 그룹이 성과를 거둔 것도 담론과 전시 기획 분야에서였다. 인디펜던트 그룹이 남긴 유산의 핵심은 그들의 토론, 디자인, 디스플레이의 '예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순수미술-대중예술 연속체 인디펜던트 그룹의 역사(1952~1955)는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ICA)를 빼고 말하기 어렵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나름의 재량권을 가진 ICA의 R&D 분과 .. 2019. 8. 17.
1957b 애드 라인하르트, 로버트 라이먼, 아그네스 마틴, 모노크롬과 그리드 ▲ 애드 라인하르트가 「새로운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개의 규칙」을 쓴다. 유럽에서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던 무렵 미국에서는 라인하르트, 로버트 라이먼, 아그네스 마틴이 모노크롬과 그리드를 탐색한다. 라인하르트는 1959년의 글 「새로운 아카데미가 존재하는가?」에서 아카데미적이 돼 버린 추상, 다시 말해 디자인이나 광고, 건축의 요구에 부응하는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추상의 유형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진정한 추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추출 미술"이라고 비난하며 그 미술은 "교육, 의사소통, 지각,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인하르트가 '새로운 아카데미'를 진정으로 원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아카데미는 17세기의 아카데미.. 2019. 8. 14.
1953년 로버트 라우셴버그, 엘스워스 켈리, 사이 톰블리 ▲ 작곡가 존 케이지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업 「타이어 자국」에 참여한다. 라우센버그, 엘스워스 켈리, 사이 톰블리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표의 흔적이 표현적인 자국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발전한다. 흰색이 고르게 칠해진 가로세로 1.2미터짜리 정사각형 캔버스를 떠올려 보자. 다음으로 백지에 가까운 드로잉 한 점을 떠올려보자. 잉크와 크레파스 자국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드로잉에는 "데 쿠닝의 드로잉 지우기, 로버트 라우셴버그, 1953년"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종이 한가운데 타이어 자국이 새겨진 7미터 길이의 두루마리를 떠올려 보자.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세 작품을 강하게 연결하는 것은 바로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미술계를 장악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2019. 8. 13.
1951년 바넷 뉴먼 Barnett Newman ▲ 바넷 뉴먼의 두 번째 개인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동료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버림받은 그는 미니멀리즘이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선구자로 추앙받게 된다. 50년대 내내 뉴먼은 가끔씩 그룹전에 하두 작품을 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1958년 개인전이 열리고 뒤이어 1959년 뉴욕 프레치 앤드 코 갤러리에서 첫 번째 회고전이 열렸을 때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51년 뉴먼을 괴롭힌 것은 계속되는 언론의 적대감이나 무관심보다는 수년간 그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동료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의 냉담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료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전시서문을 쓰고 대변인과 감독 역할까지 하곤 했다. 1950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는 그리 크지 않았던 뉴욕 미술계 전체가 몰려왔는데 그.. 2019.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