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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50년대 노트

1953년 로버트 라우셴버그, 엘스워스 켈리, 사이 톰블리

by 책방의 먼지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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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존 케이지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업 「타이어 자국」에 참여한다. 라우센버그, 엘스워스 켈리, 사이 톰블리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표의 흔적이 표현적인 자국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발전한다. 

흰색이 고르게 칠해진 가로세로 1.2미터짜리 정사각형 캔버스를 떠올려 보자. 다음으로 백지에 가까운 드로잉 한 점을 떠올려보자. 잉크와 크레파스 자국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드로잉에는 "데 쿠닝의 드로잉 지우기, 로버트 라우셴버그, 1953년"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종이 한가운데 타이어 자국이 새겨진 7미터 길이의 두루마리를 떠올려 보자.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세 작품을 강하게 연결하는 것은 바로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미술계를 장악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 「데 쿠닝 드로잉 지우기 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로버트 라우셴버그, 존 케이지 참여 「자동차 타이어 자국 Automobile Tire Print 」 1953

다다의 귀환 

타이어 자국처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선만큼이나 비자발적이고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텅 빈 캔버스만큼이나 '모험'의 현장에서 후퇴한 것도 없다. 힘든 싸움을 통해(해럴드 로젠버그의 표현대로) 자기 "존재"의 "형이상학적 실재"를 선언하려 했던 액션페인팅 화가들의 무대는 이 텅 빈 캔버스를 계기로 모노크롬 레디메이드로 변형됐다. 그리고 「데 쿠닝 드로잉 지우기」는 작가의 붓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추상표현주의를 겨냥하여, 지우는 동작의 반복만큼이나 이런 정서에 반하는 것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여기서 제작자의 정체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지우는 행위'의 대상은 드로잉 자국과 그것을 지운 흔적 모두였으며, 그 지우는 방식은 기계적이었다. 

그러나 액션페인팅을 비판한 이 세 작품이 그저 허무주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제작한 「흰색 회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 확신은 블랙마운틴의 교사이자 실험적인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가 전개한 입장과 유사하다.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게이지는 '행위'의 인위성, 즉 작곡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에 대한 반대로서 수동성을 찬양했다. 만물을 구축하는 보편적인 질서는 우연과 무작위라는 관념에 매료된 케이지에게 음악은 침묵과 소음이 우연히 뒤섞인 무엇이었다. 

라우셴버그의 「흰색 회화」 연작은 케이지와의 상호 교류를 통해 탄생했다. 하나에서 두 개로, 다시 세 폭, 네 폭, 다섯 폭, 일곱 폭으로 단순한 수열 공정에 ㄸ라 제작된 이 연작은 내러티브는 물론 지시 대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라우셴버그는 늘 자신의 연작에 대해 "그림자를 포착하는 흰색 회화"라고 말했다.

이 무렵 사진 작업을 활발히 했던 라우셴버그는 스쳐가는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스크린으로서의 회화 개념과, 초점이 맞춰진 부분의 인상을 기록하는 사진의 감광 표면을 연관시켰다. 그림자와 사진의 관계 또는 레디메이드가 그것이 선택된 바로 그 순간, 즉 '만남'의 지표가 되는 상황 모두에서 문제가 됐던 '지표의 본성'을 뒤샹이 다뤘던 것처럼, 「흰색 회화」에서 회화와 사진과의 관계를 탐구했던 라우셴버그의 작업은 타이어 자국과 데 쿠닝 지우기를 통해서 지표적 흔적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로 귀결됐다.  

 

비구성을 위한 법칙

엘스워스 켈리의 궤적도 라우셴버그와 유사하다. 이 무렵 지표의 논리에 천착하던 켈리 또한 작가 고유의 흔적을 제거하고 비구성 형태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러나 라우셴버그와 달리 켈리는 뒤샹을 선례로 삼지 않았으며, 추상표현주의가 아니라 기하학적 추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1948년 당시 유럽 미술계는 통일적인 기하학 형태가 미래 사회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균형 잡힌 구성이라는 개념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하학적 구성 방식은 의식적으로 개인의 분노를 새겨 넣는 액션 페인팅의 붓질과 거리가 멀었지만 여전히 표현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왜냐하면 여기서 미술가는 '이성'의 씨실과 날실로 세계를 직조하는 조물주였기 때문이다. 

당시 켈리는 이와 같은 '구성'의 정서에 저항했다. 주변 화다느이 경향에 신물이 난 켈리는 오래된 석조 건물과 다리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발견된 오브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 켈리의 초기 수작은 1949년 말에 제작됐다. 일종의 추상회화처럼 보이는 「창문, 파리근대미술관」은 지시 대상(복사되거나 스텐실로 본뜬 실제 대상)을 곧바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구성을 별도로 요구하지 않았고, 동시에 그 자체가 지시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지표의 형태로 켈리의 작품 표면에 전시된 이 발견된 형태들은 때로는 사물일 수도 때로는 건축물일 수도 있었다. 켈리는 뒤샹과 동일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이미 지표인 것(드리워진 그림자)을 다시 지표(전사한 후 채색한 지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생긴 자국의 원천이나 지시 대상을 제거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 자국은 '구성되지'않고도 캔버스 표면을 분할하고 있었다. 

1949년 여름 켈리는 존케이지를 만났다. 존 케이지는 켈리의 작업에 우연이 개입될 때의 이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우연은 발생한 사건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지표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었으며, 그 사건의 목격자가 개입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구성을 피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켈리가 우연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1951년 작품 「커타란 벽을 위한 색상들」을 보면 '이미 만들어진' 단위인 그리드는 내부 구성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고, 그 결과 캔버스를 이루는 각 패널들은 각각이 모듈이 됨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색상표에 근거해 색상을 결정하고 그것을 임의로 배열한다는 점에서 레디메이드는 하나의 원칙으로 작용한다. 

Window Museum of Modern Art, Paris
Colors for a Large Wall

 

지표의 귀환

지표가 추상표현주의의 표현적 붓질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재스퍼 존스가 「원 그리는 장식」(1959)를 시작으로 일련의 회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이 작품에서 존스는 채색이 마르기도 전에 붓질을 가하여 물감을 뭉갰던 데 쿠닝의 악명 높은 자국을 모방했다. 물론 존스는 그 과정을 기계화했지만 말이다.  
사이 톰블리의 작품은 드 쿠닝보다는 폴록의 드립 페인팅을 드로잉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후에도 톰블리는 수년에 걸쳐 연필과 같이 끝이 뾰족한 도구로 캔버스 물감에 흠집을 내서 폴록의 엉킨 실타래를 날카롭게 패인 선으로 바꾸어 놓았다. 분명 추상표현주의의 작가적 흔적에 대항해 톰블리가 택한 전략은 오히려 그 자국 자체를 낙서의 형태로 기록하는 일, 다시 말해 익명의 흔적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낙서는 일종의 찌꺼기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낙서는 액션페인팅 화가들의 신조의 근거가 되는 기본 전제를 깨는 것이다. 그 신조란 작품은 작가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며, 작가는 이런 자기 인식의 행위를 통해 작품의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울이 존재의 모델(거울에 비친 주체의 자기 현전)로 작용한다면, 낙서 자국은 부재의 기록이자 사건이 일어난 후에 남은 흔적이다. 구조상 낙서는 그 낙서 자국에 낙서를 한 제작자의 부재를 입증함으로써, 그것이 더럽힌 표면을 공격할 뿐 아니라 거울에서 으레 기대되는 작가의 반사상을 깨뜨리고 작가마저 공격한다. 

「멋대로 굴러가는 바퀴」에 와서야 톰블리의 자국은 비로서 그 위력과 일관성을 갖게 되며, 수년 전 제작된 라우셴버그의 「데 쿠닝 드로잉 지우기」에 내재된 지우는 붓질의 폭력성을 노출시킨다. 두 사람 모두 '구성하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반복과 자의성에 주목한 것처럼 액션페인팅이 추구한 작가의 자기 현전에 맞서고자 지표를 전략적으로 택한 것이다. 

사이 톰블리 「멋대로 굴러가는 바퀴 Free Wheeler」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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