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드 라인하르트가 「새로운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개의 규칙」을 쓴다. 유럽에서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던 무렵 미국에서는 라인하르트, 로버트 라이먼, 아그네스 마틴이 모노크롬과 그리드를 탐색한다.
라인하르트는 1959년의 글 「새로운 아카데미가 존재하는가?」에서 아카데미적이 돼 버린 추상, 다시 말해 디자인이나 광고, 건축의 요구에 부응하는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추상의 유형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진정한 추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추출 미술"이라고 비난하며 그 미술은 "교육, 의사소통, 지각,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인하르트가 '새로운 아카데미'를 진정으로 원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아카데미는 17세기의 아카데미처럼 미학적 순수성을 보호하고, 고급예술과 그것을 응용한 변종 사이의 차이를 지켜 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아카데미가, 미술이란 본질적으로 "'시간을 넘어서는' 존재이며, 순수함을 만들고, 미술 이외의 모든 의미를 제거하고 정화할 것"임을 명확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흑색 결합
이런 정화를 위한 라인하르트의 노력은 추상의 두 가지 주요한 패러다임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바로 20세기 초에 완성된 그리드와 모노크롬이었다. 라인하르트의 흑색 회화는 그리드의 경계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모노크롬 회화 표면과 비슷한 효과를 냈으며, 이를 통해 '배경'에서부터 '형상'이 드러나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같은 기법을 써서 작품을 창문이나 거울로 인식하게 해서 그것이 '다른 곳'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일체의 인식을 거부했다. 이 결과 생긴 '자기 지시'는 그리드와 모노크롬 모두가 보증하는 것, 즉 그 자체로 시작해서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묘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려지고 반복될 뿐인 바로 그 표면밖에 없다.)
아홉개의 그리드로 된 라인하르트의 마지막 흑색 회화 역시 가장 순수한 논리적 진술(관념)로 환원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화면의 시각적 흔들림(물성)을 경험하게 만든다.
순수한 역설
라인하르트가 마지막 흑색 회화 연작을 진행하던 1960~64년에 두 명의 다른 미술가,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과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1930~)은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해 라인하르트와 같은 형태의 모순적 조건을 보여 주는 작업을 했다.
자연 속에서 객관적인 대응물을 결코 찾을 수 없는 주관적인 사유와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마틴은 추상으로 관심을 돌려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녀의 미술이 갖는 장점은 정신적, 물질적 이중성을 결집해 완전히 다른 의미 체제를 갖는 그리드로 만든다는 점이다. 마틴의 작업은 '구조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빛에 관해 보자면 마틴의 회화 표면에서 발산되는 안개 같은 분위기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경험은 이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때 압도해 오는 물질적 특수성이다. 연필선이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지나갈 때는 울퉁불퉁하게 그려지지만, 캔버스 틈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젯소 코팅 아래로 보이는 일련의 선들의 희미한 흔적은 코팅 위에 또 다른 (연필)선들과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그리드의 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화 표면에서 충분히 뒤로 물러났을 때만, 이런 물질에 대한 감각이 물러나고 대기 같은 빛의 감각이 발생한다. 그러나 더 멀리 물러나게 되면 시각적으로 안개 같은 느낌은 단단하고 평평한 벽의 불투명함으로 변하여, 또 다른 물질 자체, 좀 더 일반적인 형태가 돼 버린다. 다시 말하면 캔버스가 '대기 같은 빛'이 되는 것은 오직 작품을 물질적 대상으로 경험하는 것과 관련될 때만, 즉 다른 경험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틴의 미술이 구름이든 하늘이든 빛이든 무한의 숭고함이든 특정한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하나의 구조적 패러다임을 발생시켰는데, 여기서 대기는 직관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 내에 놓인 하나의 단위의 문제가 된다. '형태'식의 대기를 기의(이미지의 내용)에서 기표('대기')로, 즉 변별적인 계열 내에 있는 열린 항으로 변환시킨다.
이 구조적 패러다임에서 그 무엇은 현상학적 충만함('내 앞에서 내가 본 빛')으로 경험되지 않고 그것이 아닌 것('빛'='불투명하지 않음')과의 지속적인 관계에서 경험된다. 즉 그것의 현전은 그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만 겨우 드러난다. 마틴의 작품에 대해 순수한 "공간의 광활함"이나 "순수한 정신"이라는 환원적인 독해가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 떄문이다.
물감 그리기
로버트 라이먼의 작업도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 해석의 대상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 측면에서였다. 60년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라이먼은 프로세스 아트 미술가로 간주됐는데, 그의 작품에는 재료를 처리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떄문이다. 「윈저」라 불리는 일군의 작품에서 과정은 그의 작업을 순수하게 실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마치 한 세트의 작업 과정을 모아 놓은 것 같아서 언제라도 앞에 놓인 증거를 토대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순수한 물질이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질이 전개된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틴이 매끄러운 공간적 광활함이란 관념을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라이먼은 이런 시간적 연속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의 작업 또한 구조적 패러다임과 관계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III」, 「IV」, 「V」,「VII」 연작에서 그는 열세 개의 1.5미터짜리 정방형 골판지 패널을 위, 중간, 아래의 세 부분으로 나눠 에나멜(흰색의 셀락 안료)을 비스듬하게 휘갈겼다. 그 결과 「VII」에서 보이는 것처럼 붓질이 불연속적이어서 제스처의 '과정'을 재구성할 수 없게 됐으며, 과정의 연속성은 유일무이한 대상의 불연속으로 나아가게 됐다. 마틴의 '정신'이 그런 것처럼 이항적인 체계 속에서 대체 가능한 라이먼의 '물질'은 그리드의 내적 모순을 풀어 버리고, 또 그 모순에 의해 풀어 헤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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