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팝아트의 선구자인 인디펜던트 그룹이 전후 시기의 미술, 과학, 기술, 제품 디자인, 대중문화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이들의 성과는 런던에서 열린 전시 《이것이 내일이다》에서 절정을 이룬다.
엄밀히 말해 인디펜던트 그룹은 예술 운동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던 스터디 그룹에 가깝다.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끈 사람은 건축 문화 미술의 평론가들이었다. 이 그룹이 성과를 거둔 것도 담론과 전시 기획 분야에서였다. 인디펜던트 그룹이 남긴 유산의 핵심은 그들의 토론, 디자인, 디스플레이의 '예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순수미술-대중예술 연속체
인디펜던트 그룹의 역사(1952~1955)는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ICA)를 빼고 말하기 어렵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나름의 재량권을 가진 ICA의 R&D 분과 기구였다. 1946년에 뉴욕근대미술관을 모델로 롤랜드 펜로즈와 초대 관장 허버트 리드 같은 저명한 저술가들에 의해 설립된 ICA는 모더니즘을 옹호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화가, 건축가, 비평가들이 보기에 초현실주의(펜로즈)와 구축주의(리드)가 애매하게 섞인 ICA의 모더니즘은 전쟁 이전 아카데미의 잔재(밴험의 표현대로 "추상 좌파 프로이트 미학")에 지나지 않았다. 1951년에 도로시 몰랜드가 관장으로 취임하자 이 젊은 반란군들은 자신들만의 포럼을 개최하고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인디펜던트 그룹이 탄생한 이데올로기적 상황은 이랬다. 대영제국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내핍이 지속됐으며 세계는 원자폭탄의 위협과 함께 갑자기 냉전 시대와 새로운 기술 진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구시대의 유럽 모더니즘과 미국 대중문화의 섹스어필이 충돌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미국 대중문화는 각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풍요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포럼을 통해 재빨리 디스플레이와 디자인, 과학과 기술, 미술과 대중예술에서 뻗어 나온 분야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이 점점 과학과 기술에서 멀어졌는데 이후 해밀턴의 언급처럼 대중적인 재현의 문제는 항상 인디펜던트 그룹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ICA 지도부는 이를 반겼는데 1955년에 인디펜던트 그룹의 공식적 모임이 종결되면서 그들의 프로그램이 ICA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에는 주요 회원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고 영국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또한 리처드 스미스, 피터 블레이크를 필두로, 데릭 보시어, 데이비드 호크니, 앨런 존스, 로널드 B. 키타이 같은 미술가들을 배출한 왕립미술학교로 옮겨졌다. 이들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앨러웨이가 유통시킨 '팝아트'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분류됐으며, 실제로 대다수는 60년대 미술, 음악, 패션의 팝 문화 산업의 적극적인 중개자가 됐다.
게시판 미학
강연과 함께 진행된 인디펜던트 그룹의 전시회에서 회원들은 작가보다는 문화 큐레이터 역할을 담당했다. 주목할 만한 네 개의 전시 중 첫 번째는 1951년 여름 해밀턴이 기획한 《성장과 형태》전이다. 여기에 도입된 비 미술이미지, 멀티미디어, 미술형식으로서의 전시 디자인은 이후 인디펜던트 그룹 전시의 핵심 요소가 된다. 둘째 1953년 가을 핸더슨, 파올로치, 스미스슨 형제가 기획한 《삶과 예술의 평행선》전에서는 100배 정도 확대된 모더니즘 미술(칸딘스키, 피카소, 뒤뷔페), 부족미술, 아동 드로잉, 상형문자 이미지와 인류학, 의학, 과학과 관련된 ㄷ이미지를 다양한 각도와 높이로 매달아 전시실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콜라주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문화를 가로지르는 변형들을 제시했다. 세 번째 전시 《인간, 기계, 운동》은 1955년 여름 ICA에서 해밀턴이 제안한 변형된 인간 이미지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도 확대된 사진 이미지들이 제시됐는데 대개 바다, 대지, 지구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인간과 기계 이미지였다. 테크놀로지 인간을 미래주의적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는데 이런 관점은 구태의연하고 그저 환상적인 뿐이었으며, 이렇게 자신을 포함하여 '미래'의 노화를 기꺼이 환영하는 것이 인디펜던트 그룹의 특징이기도 했다.
네 번째 《이것이 내일이다》 전은 열두 개의 작은 전시로 구성되어 1956년 여름 런던 동부 지역에 있는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렸다. 몇몇 전시는 구축주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던 반면, 미술을 기술과 대중문화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 전시들은 미학적 패러다임이나 미술 고유의 법칙을 따르기보다는 전시 전체가 그 자체로 중심이 되고 있었다.
이 전시의 대표적인 이미지 「도대체 무엇이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가?」에서 해밀턴의 작은 콜라주는 예술 작품보다는 포스터나 카탈로그와 같은 것으로 의도됐다. 「나는 부자의 노리개였다」 등의 파올로치가 이전에 제작한 콜라주들처럼 이 작품도 광고 문구나 파편화된 이미지로 이루어진 전후 소비문화를 심리학적이고 팝아트적인 방식으로 패러디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기입된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니스인 양 투시팝 막대 사탕을 든 보디빌더와 전등갓을 쓰고 가슴에 세퀸 장식을 한 풍만한 몸매의 여성이 가정집 실내에서 오늘의 "고결한 원시인들"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아도취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를 가리키는 팝-페니스와 장식된 가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대리물과 상품으로만 연결된다. 오른편 TV 화면 속의 전화받는 여성은 생방송 광고처럼 화면 왼편에서 되살아나 유난히 긴 호스가 달린 진공청소기를 끌면서 남근으로서의 가전제품-상품이라는 주제를 반복한다.
얼핏 가정을 통제하는 듯 보이는 여성 또한 상품이다. 심지어 보디빌더에 대한 환상을 품을 때조차도 그녀는 벽에 걸린 가장의 초상화와 신문이 놓인 안락의자가 암시하는 부재중인 집주인에 의해 감시당한다. 더욱이 외부 세계는 철저하게 실내로 침투해 들어온다. 이렇게 상품과 미디어는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을 제거한다. 전등갓에 등장하는 포드 자동차의 장식은 이 가정의 문장처럼 보인다. 여기서 해밀턴은 자동차, TV, 상품을 교체하는 일이 멀지 않아 소비 자본주의의 중추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렇게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성적 물신주의와 상품 물신주의, 그리고 테크놀로지 물신주의의 만남은 인디펜던트 그룹의 영원한 주제였다. 이 주제는 전쟁 직후 여성의 신체와 군무기를 병치시켰던 파올로치의 작업에서 시작됐고, 해밀턴에 와서는 50년대 상품 디자인으로 승화된 여성의 신체를 통해 전개됐다. 이후 이 주제는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1933~)나 톰 웨셀만(Tom Wesselmann, 1931~) 같은 60년대 미국 팝아트 미술가들에 의해 계승됐고, 물론 그들에게는 이런 비유기적 에로티시즘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디펜던트 그룹의 이런 열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들은 분명 그린버그 같은 영미 형식주의자나 아도르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평가들이 수행한 대중문화 비판에 과감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디펜던트 그룹의 팝아트적 방식이 맹목적인 찬양이거나 속된 것은 아니다.
'게시판 미학'은 예술을 과학기술에 접목시키고, 예술-팝 연속체를 탐색하며, 상품화된 신체로 유희하는 "인디펜던트 그룹의 활동에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콜라주는 이미 문화 산업의 도구가 돼 있었다. 턴불이 언급했듯이 "잡지는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무작위화한다. 한 페이지에는 음식이, 다음 페이지에는 사막의 피라미드가, 그다음 페이지에는 매력적인 그녀가 나타난다. 마치 콜라주 같다." 이 언급에서 암시되고 있는 사실은 초현실적인 병치가 이미 광고의 재료가 됐다는 점, 그리고 인디펜던트 그룹이 비판적 태도에서 콜라주를 재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해밀턴이 "과거 수년간의 탐색"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리라고 결심했을 때 그의 결론은 회화로의 복귀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은 예술-팝 연속체의 일방통행로가 됐다. 대부분의 팝아트도 그랬다.
인디펜던트 그룹의 예술 비판이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될 때조차도 그들의 작업은 생산 중심의 경제가 소비 중심의 경제로 이행하는 역사적 순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이행을 배경으로 전후 아방가르드는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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