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스퍼 존스의 「네 개의 얼굴이 있는 과녁」이 《아트뉴스》 표지에 실린다. 프랭크 스텔라 같은 미술가들에게 존스는 형상과 배경이 하나의 이미지-사물로 융합된 회화 모델을 제시했으며, 다른 이들에게는 일상의 기호와 개념적 모호함을 사용하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아트뉴스》 표지에 작품이 실린 지 2주가 지난 1958년 1월 20일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는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초만원을 이뤘고 네 점의 회화가 앨프리드 H. 바에게 팔렸다. 이처럼 전례 없는 성공적인 데뷔는 미술계 문호가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젊음(당시 존스는 겨우 27세였다.)과 홍보(무명의 미술가가 무슨 수로 《아트뉴스》 표지에 실릴 수 있었겠는가?)는 미술가의 성공을 위한 요소로 등장했으며 양식상의 급진적인 변화 또한 가속화됐다.
존스의 회화에서 보이는 진부한 주제와 개성 없는 붓질은 곧바로 추상표현주의의 고상한 주제와 의미로 충만한 제스처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됐다.
충동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
존스는 미술에 대한 다다의 무정부주의적인 공격보다는 마르셸 뒤샹처럼 미술의 의미를 풍자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1958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뒤샹의 작품을 본 후 뒤샹은 그에게 중요한 참조 대상이 됐다. 또한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평은 존스의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 집요함"에 영향을 미쳤다.
존스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전략에서 뒤샹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존스는 "미리 만들어진, 관례적인, 탈개인화된, 실제의, 외부적인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상징적인 것과 지표적인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체계의 기호들을 가지고 조작했다. 또한 실제의 사물들을 모호하게, 심지어는 알레고리를 지닌 것으로 만들길 즐겼다. 예를 들어 '깃발'은 앞서가는 형식의 회화이면서 동시에 깃발 그 자체였고 또한 일상적인 표상이기도 했다. 존스는 언어 그 자체, 즉 서로 다른 기호에 의해 분열된 자아를 환기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깃발, 「과녁」은 추상표현주의의 어떤 선례보다 작품의 표면이 평면적이고 이미지는 '전면적'이며 화면과 지지체는 서로 융합돼 있다. 존스는 추상표현주의에서 금지됐던 일상적인 문화 기호들을 사용하면서도 추상표현주의적인 형식을 땄다. 그의 회화는 추상적이지만 양식 면에서는 재현적이었고, 제스처적이지만 제작에 있어서는 비개인적이었다.(그의 붓질은 대부분 반복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기지시적이지만 이미지는 암시적이고 회화적이지만 동시에 실제의 물건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대립을 무마하기 위해 존스가 찾아낸 가장 적합한 방법은 모든 붓질을 그대로 보존하는 납화 기법이었다. 이 기법으로 존스는 그림을 바탕과 하나로 묶을 수 있었고 따라서 회화를 하나의 이미지인 동시에 오브제로 만들 수 있었다.
데뷔 때 이미 그의 회화에는 모순과 역설, 반어와 알레고리를 통한 존스풍의 독특한 유희가 나타났다. 존스는 한 가지를 말하면 그것이 결국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거나(반어) 혹은 다른 수준의 의미나 다른 종류의 기호들과 충돌하는(알레고리) 방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존스 작품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충돌, 회화적인 것과 즉물적인 것의 충돌이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뒤샹으로 대표되는 아방가르드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회화 모델을 잊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여기서 그가 부정했던 '충돌'들은 개인적인 성향만큼이나 미학적인 명제였다. 존스가 아방가르드 진영에서 작동하고 있던 폴록의 유산과 뒤샹의 도발 사이의 모순을 중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빨리 미술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대립하는 패러다임들을 모호하게 결합해 독특한 미술로 발전시켰다.
감시자와 스파이
존스는 그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특히 1958년 이후의 회화에서 그는 캔버스에 칠한 색과 다른 색 이름을 스텐실 기법으로 캔버스에 새겼다. 한 예로 「잠망경(하트 크레인)」에는 원색을 지시하는 단어들이 보이지만 실제 보이는 색은 회색과 검은색이다. 이런 작업에서 스타인버그는 "그림 평면의 새로운 역할" 즉 "실재 공간으로부터 온 메시지나 그 흔적을 담고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표면"을 보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스타인버그는 라우셴버그에 대한 글에서 그림이 광경을 투사하는 스크린에서 기호를 담는 장소로 바뀌고 있다고 썼고, 이런 변환 속에 미술이 참조하는 일차 대상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동하는 '포스트모던적'전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았다.
존스는 새로운 미술가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냈다. 스타인버그는 존스의 작업의 재료와 방법이 지닌 실용주의적 객관성에 대해 "모든 것은 사용될 수 있고 사용자가 있다. 더 이상 미술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는데, 이처럼 주체가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행위보다는 인내"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추상표현주의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포스트모던적'전환의 시작으로서 일종의 "무관심의 미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스타인버그의 말대로 존스의 작업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호들을 사용함으로써 "부재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흔적은 일상적인 상징, 중지된 붓질, 파편화된 주조물에서 여전히 나타난다. 1959년 존스가 적은 것처럼 주체의 "기억 흔적" 속에서 그리고 다른 종류의 동기와 의미를 횡단하는 주체의 "변화하고 있는 초점"에서 분열돼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주체이다. 또한 주체는 관람자와의 관계에서도 분열돼 있는 듯 보인다. 1964년부터 쓰기 시작한 노트에서 존스는 분열된 주체성을 두 개의 페르소나 "감시자"와 "스파이"라는 말을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들과 동일시했다. "감시자는 본다는 '덫'에 걸려든다...... 즉 감시자, 공간 대상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속성이 있다. 스파이는 '움직일' 준비가 돼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그는 보는 우리를 염탐하는 스파이가 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응시할 때 우리를 다시 응시하는 것 같은 두려운 낯설음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존스 방식의 이미지-사물이 미니멀리즘 오브제로 이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였다. 존스에게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 초점"이지만 스텔라에게는 "보는 것이 보는 것"이었다.(이 구절은 자신의 초기 작품에 대한 스텔라의 가장 유명한 언급이다.)
스텔라는 1960년에 "회화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무엇이 회화인지 알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회화를 제작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그의 해결책은 이 둘을 합치는 것이었다. 즉 회화 제작 방식을 드러냄으로써 회화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1960년에 스텔라는 금속제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또한 캔버스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V자 모양으로 줄무늬의 방향을 변화시켰고, 이후에는 거대한 평면을 덧붙였다. 이 형태는 회화를 좀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 안드레는 이 형태가 실제 공간 속에 있는 삼차원의 사물을 떠올리게 하므로 그것들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장소 특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존스가 폴록과 뒤샹이 제시한 가능성에 자신만의 수수께끼로 응수한 것처럼, 스텔라는 후기 모더니즘 회화의 요체로서, 또는 미니멀리즘 사물의 기원으로서 주장될 수 있다.
70년대 중반 '각도기'연작 등의 작품들은 회화도 조각도 아닌 혼성적인 것이 돼 버렸다. 즉 처음에는 입체주의의 콜라주와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구조물을 연상시켰으나 이후에는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코드가 뒤섞인 것이 됐다. 이 아상블라주는 80년대에는 반바로크적인 형태, 비스듬한 그리드, 팝-기하학적인 형태, 과장된 색채와 제스처의 파편들이 하나의 알루미늄 구조물 내에서 추돌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스텔라의 회화는 모더니즘적인 분석을 넘어 후기 역사적인 혼성모방으로 나아간 듯 보였다. 존스의 교훈이 "미술이 어떤 것도 진실하지 않기에 그 반대 역시 더 진실할 수 없다는 점"이라면 스텔라의 교훈은 어떤 회화적 논리도 보증될 수 없기에 그것은 반박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회화적 논리의 위기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70~80년대에 진행된 모더니즘의 역사들, 즉 한 위대한 미술가는 다음 대가에게 영향을 주고, 그는 계속해서 그 후대 미술가들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식의 역사에 큰 위기가 닥쳤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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