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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14

2007년c 미술시장 ▲ 데미언 허스트가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을 전시한다. 실제 사람의 두개골을 백금으로 주조해 1400만 파운드 어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이 작품이 5000만 파운드에 팔리면서, 미디어의 주목과 시장의 투자 가치를 노골적으로 내세운 미술이 등장한다. 신자유주의 진영의 후원자들 회화와 조각이 운반 가능한 형태로 제작됐던 르네상스 이래 미술 생산은 근본적으로 시장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미술시장이 탄생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60년대 경제 호황기에 부상한 부르주아들은 미술, 특히 미국 팝아트에 대규모로 투자할 만한 자본을 보유했다. 그와 동시에 딜러나 켈렉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업 갤러리가 급속히 팽창하던 중이었다. 70년대의 경기 침체 이후 등장한 레이건과 대처의 규제 완화 정책은 ‘슈퍼리치.. 2019. 7. 11.
1963년 게오르크 바젤리츠 ▲ 게오르크 바젤리츠가 오이겐 쇠네베크와 함께 두 개의 선언문을 발표한 후, 베를린에서 「수포로 돌아간 위대한 밤」을 전시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타시즘으로 1962년 바젤리츠의 작품은 구상미술의 장인적 제작을 미술의 일차적 정의로 보는 과거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갈 뿐만 아니라 미술 작업이 지역적, 지방적, 국가적인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한 '새로운' 회화 미학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문화적 가치들 간의 위계를 정립하고, 독일 전후 재건 문화의 기초로서 전통적인 국가 정체성이 계속해서 유효함을 웅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리히터와 폴케의 작업은 회화적 재현이 대중 매체의 이미지 생산과 문화 산업의 기구들 바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 2019. 7. 8.
1962년a 플럭서스 운동, b 빈 행동주의 ▲ 서독 비스바덴에서 조지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 운동의 형성을 알리는 일련의 국제적 행사를 기획한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가장 복잡하고 그로 인해 전반적으로 저평가된 예술 운동으로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과 대립하면서 나란히 전개됐다.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축주의 이후의 다른 어떤 아방가르드나 네오아방가르드와 비교할 때 훨씬 개방적이며 국제적인 활동을 벌인 플럭서스는 예술과 삶을 구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도 예술적인 사건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럭서스는 '플러스' 콘서트와 페스티벌, 음악적인 퍼포먼스와 연극적인 퍼포먼스, 혁신적으로 디자인된 출판물과 선언문,.. 2019. 7. 7.
1961년 앨런 캐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미술 시장 ▲ 12월에 클래스 올덴버그가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가게」를 연다. 「가게」는 하나의 '환경'으로서 주위에 널린 저렴한 가게들의 진열 방식을 흉내 냈으며, 모든 품목은 판매를 위한 것이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10개의 다양한 해프닝이 「가게」 부지에 위치한 올덴버그의 레이 건 극장에서 수행된다.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1927~)의 에세이 「잭슨 폴락의 유산」이 《아트뉴스》 1958년 10월호에 발표됐다. " ······ 오늘날의 젊은 예술가들은 더 이상 '나는 화가다' 또는 '시인이다', '무용가다'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예술가'다. 모든 삶이 그들에게 열려 있다. 그들은 평범한 사물로부터 평범함의 의미를 발견해 낼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물을 특별하게 .. 2019.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