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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4년b 앤디 워홀

by 책방의 먼지 2019.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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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13명의 지명 수배 1호」가 뉴욕세계박람회 미국관 전면에 일시적으로 설치된다.

그는 명예(fame)가 유명세(celebrity) 아래, 아우라가 성적 매력 아래, 카리스마가 과장 광고 아래 포섭돼 버리는 상품-이미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드러내고 개척했다. 워홀은 자신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녹음기, 영화와 비디오카메라를 항상 켜 놓는 그 세계 내부의 첩자였다.

 

비판인가, 무관심인가?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와 광고의 모사본이 깨끗하고 명료한 선을 특징으로 한다면 워홀은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에서 치명적 총상을 입을 1968년 사이에 이르는 기간이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들은 이 시기의 작업들, 특히 '미국의 죽음'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에 기초한 대부분의 전후 미술이 그렇듯 여기서 이미지는 지시적인 것 혹은 허상적인 것이 된다. 

롤랑 바르트는 「그 오래된 것, 예술」(1980)에서 "팝아트가 원하는 것은 대상을 탈상징화하는 것", 즉 이미지를 심오한 의미로부터 해방시켜 허상적인 표면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적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술가 역시 해방되는데 "팝 아티스트는 그의 작품 배후에 있지 않다.", "미술가 자신은 어떤 깊이도 가지지 않는다. 미술가는 단지 자기 그림의 표면이며,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어떤 의도도 놓여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워홀의 팝에 대한 지시적인 관점은 작품을 주제와 결부시키는 사회사에 기반을 둔 비평가들에 의해 개진됐다.  

 

외상적 리얼리즘

"나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확하게 똑같은 것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의미는 점점 더 사라지게 되고,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지고 멍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복은 의미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인 동시에, 어떤 감성이 생겨나게 하는 것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다. 워홀의 반복은 외상에서 회복되거나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실한 대상에 여전히 강박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단계인 멜랑콜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반복은 외상적 현실을 막으로 가리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이미지 자체의 균열을 통해서가 아닌 이미지에 의해 촉발된 관람자 내부의 균열을 통해서 작동된다. 

반복은 외상적 실재에 고정되고 그것을 가리며 생산한다. 그리고 이 복잡성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조장하는데 이미지들이 정서적이면서도 냉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람자가 통합되지도(근대 미학 대부분의 이상인 관조를 통해 구성되는 주체) 동화되지도(대중문화의 효과인 상품-이미지의 강렬함에 굴복하는 주체)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의 주체성 

워홀은 대중 사회에서 생산된 주체의 모습에 매료됐다. 이 대중의 주체성을 재현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 대리물들, 즉 소비의 대상들(캠벨 수프, 코카콜라 병, 브릴로 상자들) 그리고/또는 취향의 대상들(1964년의 키치풍의 꽃 회화와 1966년의 민속적인 소 벽지)를 통해서 성취된다. 비평가 마이클 워너는 "대중 주체는 신체를 갖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목격하는 신체만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원칙은 왜 워홀이 대중이라는 주체를 투사물(마릴린과 마오 같은 유명 인사와 정치인에서부터 잡지의 선정적인 표지 인물들에 이르는)을 통해서 환기시키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워홀은 대중이라는 주체를 대중문화의 키치, 상품, 유명 인사들을 통해 다양하게 재현해 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더 나아가 대중이라는 주체를 그 재현 불가능성, 즉 부재와 익명성, 재앙과 죽음 속에서 재현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대중이라는 주체는 대개의 경우 대중매체의 효과로서, 혹은 테크놀로지의 고장으로 인한 대참사의 효과로서,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모두의 효과로서만 드러나기 떄문이다. 마릴린과 마오 같은 유명 인사의 아이콘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기사들은 대중 주체성이 생산되는 주요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워홀이 대중 주체를 재현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우상적인 유명 인사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추상적인 익명성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이 주체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간 방식은 유명과 익명 사이 어딘가를 절충적으로 재현함으로써이다. 다시 말해 15분 만에 명성을 얻는 헛된 명성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앤디 워홀, 「불타고 있는 흰색 차 III White Burning Car III」, 1963

 

 

앤디 워홀 「13명의 지명 수배 1호 Thirteen Most Wanted Men」,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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