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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7년a 로버트 스미스슨, 브루스 나우먼

by 책방의 먼지 201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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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퍼세이익 기념비로의 여행」을 발표한 로버트 스미스슨이 60년대 후반 미술 작업의 개념으로서 '엔트로피'를 제시한다.

로버트 스미스슨은 초기에 발표한 자신의 글 「엔트로피와 새로운 기념비」(1966)에서 "줄지어 놓여 있는 상품은 소비자의 망각 속으로 빠져든다. 내부의 이런 우울한 복잡성은 미술에 활기 없고 지루한 것에 대한 새로운 소재를 제공한다. 이 활기 없음과 지루함이 오히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많은 미술가에게 영감을 준다."라고 쓰며 곧이어 로버트 모리스, 댄 플래빈, 저드 등의 작업을 "과잉-단조로움"개념을 통해 분석하며 미니멀리즘에 대한 최초이자 탁월한 평론을 내놓는다.

 

역전된 폐허

스미스슨의 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 모델은 엔트로피 법칙이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미술 작업을 지배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글들에서 그가 돌아가려 했던 개념이었다. 19세기에 열역학 분야에서 체계화된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주어진 모든 체계 내에서 에너지의 소멸을 피할 수 없으며, 유기적인 모든 구조는 소멸하여 결국 무질서와 미분화의 상태로 되어 버린다. 엔트로피 법칙이 주장하는 바는 모든 종류의 위계적인 질서들이 최종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내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등장하면서 부터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엔트로피의 법칙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언어에서 단어가 상투적이 되면 사라지게 되는 방식과 사용가치가 대량 생산 체제 내에서 교환가치로 대체되는 방식을 설명하는데 응용됐다. 

스미스슨은 엔트로피의 작용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 인간과 인간의 자만에 대해 결정적인 비판을 제공한다고 재해석했다. 이런 관점에서 엔트로피의 논리를 진행시키면 오랫동안 의심의 대상이었던 추상표현주의의 파토스뿐만 아니라 미술의 자의성에 맞서는 모더니즘의 투쟁(각 미술 장르에서 그것에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관습을 제거하는 것이라 알려진) 즉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글들에서 점점 더 교조적으로 돼 갔던 관념 또한 부적절한 것이 된다. 엔트로피는 모든 사물과 존재의 유일한 보편적 조건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자의적일 수 없다. 엔트로피의 이와 같은 본성이 편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미스슨은 「흘러내린 아스팔트」를 구상했따. 스미스슨은 이 작품에서 폴록의 흘리기 과정과 그 중력 작용을 근본적으로 엔트로피적인 것으로 읽었다. 

스미스슨이 공룡과 화석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은 역사를 연이은 재앙들의 누적으로 보는 역사에 대한 본질적으로 반인간주의적인 그의 구상 때문이었다. 따라서 쇠퇴로서의 시간은 그의 가장 확고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리고 이는 단지 '새로운' 기념비만이 아니라 '반기념비' 즉 모든 기념비의 쇠퇴에 대한 기념비를 창조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기념비들 중 특히 공사 현장을 "역전된 폐허"의 공장으로 보았다. 모든 것은 그것이 과거에 무엇이었든 심지어 그것이 과거를 갖기 전에도 결국에는 똑같이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이는 또한 어떤 중심도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고 어떤 위계도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처음에는 인간 스스로 특징 없는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대개 이 사실을 무시하지만)이 해방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중심 없는 세계(또한 자아가 어떤 경계도, 속성도 갖지 않는 세계)는 무한한 탐색이 가능한 미로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미스슨, 「흘러내린 아스팔트 Asphalt Rundown」, 1969년 10월 로마

무표정한 덧없음

브루스 나우먼은 뉴욕 미술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60년대 중반에 사물들 사이의 공간 주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우먼의 작품들은 모든 의미가 제거되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란 의미만이 남아 있는 엔트로피의 세계 속에서 시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의미가 비워져 있음을 보여 준 스미스슨의 「뒤집힌 나무」(1969)보다도 이른 시기의 것이다. 나우먼 또한 의미의 사라짐을 탐색했다. 만약 나우먼의 작품에 제목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무엇의 주형물인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미스슨과 나우먼은 모두 (정체성, 자아의) 중심 개념을 거부했는데 거울의 반사 작용이 이미지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매료됐다. 스미스슨의 일시적인 작업인 「거울 치환물」(1969, 유카탄 여행 중에 스미스슨이 정사각형의 거울들을 대충 격자 형태로 다양한 장소에 배치하고 사진을 찍은 작업)에서 그는 거울은 그것이 담아내는 풍경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실을 통해 바라보기 개념을 문제 삼는다. 이 이미지들이 담아내는 것은 단지 여설적으로만 '사건들'이라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들이 전달하는 정보는 이미지의 덧없음이라는 사실 말고는 없다. 

브루스 나우먼 「내 의지 밑 공간 주형물 A cast of the space under my chair」 1965~68

 


▶관련글: 1962년c 댄 플래빈, 칼 안드레, 솔 르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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