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비평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첫 번째 아르테 포베라 전시를 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예술 작업은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불쌍한 또는 가난한 미술)로 다시 확립됐는데 미국 미술의 헤게모니, 특히 미니멀리즘 조각에 맞서 겨뤘고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그것이 가지는 모든 내적 모순과 함께 전쟁 이후의 맥락 안에 복원시켰다.
모순들의 첫 번째는 테크놀로지였다.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미국 미니멀리즘 조각의 기본 방향 혹은 제작 방식을 테크놀로지로 잘못 이해했고 이에 따라 반테크놀로지적인 자세를 표방했다. 두 번째, 사진을 배제했다. 세 번째 특징은 아르테 포베라가 작업의 재료 및 제작 과정과 맺는 특이한 관계이다. 아르테 포베라는 다른 지역의 아방가르드 작업에서 확립된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가 지나간 유행의 대상에 기억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 상품 문화에서 보이는 진부함을 활용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아르테 포베라도 진부한 생산 양식을 그것의 고유한 역사적 기획으로부터 복원하고자 했다.
온고지신
아르테 포베라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해 주는 것은 60년대 중반에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 1925~2003), 자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 1936~), 피노 파스칼리(Pino Pascali, 1935~1968)가 제작한 작품들이다. 이들은 특이한 유형의 아상블라주를 제작했는데 테크놀로지적인 요소를 진부하게 만들고 장인적 측면에 다시금 정화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 한 예로 쿠넬리스가 1968년 라티코 갤러리에 설치한 「12마리의 말」을 들 수 있다. 제도적 틀 안에 자연의 대상을 들여온 이 작업은 문화 공간에 자연을 재등장시켜 충격을 줌으로써 아르테 포베라의 미학을 보여 주었다. 전시 기간 내내 열두 마리의 짐말을 전시해 조각적 오브제를 외부와 분리된 하나의 형태라든지 테크놀로지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담론적 구조로 간주하는 모든 주장에 단호하게 맞섰다. 대신 이 작업은 비담론적인 구조와 비테크놀로지적, 비과학적, 비현상학적인 예술적 관습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경험을 강조했다.
「12마리의 말」이 보여준 지역적 특수성의 신화에 대한 강조와 자연적이고 비형식적이며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경험에 대한 강조는 피노 파스칼리의 60년대 중반의 작업들과 비교될 수 있다. 파스칼리의 작업에서도 연극성, 서사, 재현의 관습들이 회화와 조각의 제작에 다시 도입된다. 이것은 60년대 내내 미국의 조각 제작을 지배했던 현상학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접근의 개념들과 명백히 모순된다. 이와 관련된 적절한 예로 1964년 진행된 혼합 작업 「소극장」이 있다. 여기서 회화는 해체되고 조각은 연극 무대의 혼성적 상태로 변형된다. 이런 형식을 통해 파스칼리는 후기 모더니즘 미술이 어디까지 서사를 금지시켰으며 자기 규정의 기획하에서 언어와 퍼포먼스를 삭제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두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예술적 매체 또는 미적 범주나 장르가 지녔다고 가정되는 순수성은 부정되어 이미 재고의 여지없이 혼성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혼성의 증명이 아르테 포베라 미학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정식화된 미학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이다. 파졸리니는 고대 비극 및 그것이 고대 제의에 참여한 방식을 참조함으로써 신화를 통해 형성된 언어 이전의 경험에 의지해 담론적인 것에 대항하고자 했다. 따라서 파졸리니는 모더니즘적 실천에 대항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했고 아르테 포베라는 그 틀 안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예술 작품을 사회적으로 공유된 정치적 행위의 공간과 관람자에게 다가설 새로운 방식 내에 다시 위치시켜야 할 필요를 강조했는데 이 같은 태도는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의 자율성 개념에 대한 저항이란 정치적인 함축을 가정하고 있었다. 파졸리니가 영화 영역에서 아르테 포베라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시각 예술 영역에서는 부리, 폰타나, 만초니가 그러했다.
부리의 작품에서 언제나 부서지고 퇴색되고 찢겨지고 불타 버린 것으로 제시되는 이런 재료들에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방가르드가 테크놀로지적인 생산 양식을 받아들이며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약속이 결여되어 있다. 폰타나는 모노크롬 회화의 유산을 수용하면서 네오아방가르드의 시도에 합세해 자기 반영, 정화, 극단적 환원이란 담론 속에 아방가르드를 재위치 시키려 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피에로 만초니였을 것이다. 그는 과학 기술적인 근대성과 장인적인 성격의 고대성(신체를 통해 언어 이전에 이뤄지는 기본적인 형식의 경험으로 회귀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는) 사이의 기본적인 딜레마를 부조리의 문턱까지 밀어붙였던 미술가이다. 만초니가 지각의 토대로 신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런 활동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미술가의 똥」,「미술가의 숨결」 혹은 예술가의 피를 담고 있는 작품들에서준 제의적인 방식을 통한 미적 체험의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했다.
기억의 언어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활동 초기부터 미술 제작 내에서 점점 더 중요해져 가는 언어적 요소에 맞서거나 동조해 왔다. 조반니 안젤로(Giovanni Anselmo, 1934~)의 「비틀림」에서 우리는 이 이탈리아 조각가가 재료와 제작 과정 사이에서 멈춰 선 하나의 조각 작품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으로서 만유인력, 물질적 저항, 강도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작품과 미국 작가들의 차이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질감과 촉감을 지닌 재료들(직물과 강철)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시간성의 대립이기도 한데, 전시된 직물의 강렬한 비틀림은 분명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힘의 강조를 통해 관람자는 산업 테크놀로지와 과학 지식의 시대에 실제로 조각의 제작을 지배하는 것이 조건과 재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대립쌍에 대한 거의 구조주의적 관심은 주세페 페논(Giuseppe Penone, 1947~)의 「8미터의 나무」 같은 작품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데에도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에서 자연으로의 되감기로서 산업적 대상을 반-산업적이며 반-장인적인 극단적으로 조심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연적 기원을 회복시킨다.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이 종종 '시적인'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역사적 기억의 갑작스러운 현현을 비판적인 동시대적 급진성과 융합해 내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아르테 포베라 미술가들이 미국의 작가들보다는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미술가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일방적인 테크놀로지적 과정의 미혹에 빠지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회귀와 진보, 회고와 전망의 모순적인 교차로에서 장소와 정체성에 대한 주체의 감각을 산출하는 예술적 실천을 정의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 > 1960년대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8년a 베셔 부부, 신즉물주의 사진, 전후 독일미술 (0) | 2019.07.31 |
---|---|
1967년c 프랑수아 모렐레, 이브 클랭, 다니엘 뷔랭 (0) | 2019.07.30 |
1966년b 루이즈 부르주아, 에바 헤세, 쿠사미 야요이 (0) | 2019.07.27 |
1967년a 로버트 스미스슨, 브루스 나우먼 (0) | 2019.07.26 |
1966년a 마르셀 뒤샹, 「주어진」 (0) | 2019.07.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