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BMPT 그룹의 네 명의 미술가는 각자가 선택한 단순한 형태를 캔버스마다 정확하게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대중 앞에서 첫 번째 선언을 한다. 그들의 개념주의 회화 형식은 전후 프랑스의 '공식적인' 추상미술에 가해진 잇따른 비판들 가운데 최후의 것이다.
지금껏 미국 예술가의 입에서 나온 가장 국수주의적인 언급은 도널드 저드의 "나는 유럽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고 유럽 미술은 끝났다고 생각한다."라는 논평이다. 스텔라는 자신과 비교되곤 했던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회화 화가들에 대해 "그들이 열심히 제작하고 있는 거은 내가 상관 회화(relational painting)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생각의 기초는 균형이다. 한쪽 구석에 무엇인가를 하고 나면 다른 쪽 구석에도 무엇인가를 해서 균형을 맞춘다....... 최신 미국 회화에서...... 균형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평면의 모든 것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구성의 효과를 피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 달라는 질문에 저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효과들은 전체적인 유럽 전통의 구조와 가치 그리고 감각 모두를 수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 미술의 특성은...... 합리주의, 이성 중심의 철학과 연결돼 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그릇된 분할
저드는 그의 다른 동료 미니멀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미술에서 각 부분들 간의 상관적 관계를 피하고 주관적인 결정을 제거하는 '논리적' 체계를 고안하려 했다. 평론가나 대중은 저드의 이런 반합리주의적 태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저드는 그 문제 해결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저드와 스텔라가 내세운 미국과 유럽이라는 지리적인 이분법의 관점은 근거가 빈약했고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에 이미 이른바 반전통적인 무관계 미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몇몇 작품들)
대서양의 양편에서 공히 문제시됐던 것은 예술에서 행위 주체의 본성인 작가성이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대단위로 자행된 인류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그 어떤 개별적 주체의 인간성도 불확실해지는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 화가들이 '예술적 주체, 즉 작가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막스 빌의 체계적 예술에 대항하는 우연성
프랑수아 모렐레(François Morellet, 1926~)는 1952년까지 막스 빌의 체계적 예술개념을 완전히 터득했다. 체계적 예술 개념이란 오로지 일련의 선험적 법칙에 의해 프로그램된 예술로 원칙적으로 예술가의 주관성이나 구성의 자의성에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가장 결정론적인 시스템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주관적인 선택의 자의성을 막기 위해 모렐레는 우연성(시스템의 절대적 결여, 완전한 자의성)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60년부터 시작된 「전화 번호부의 홀수와 짝수를 이용한 정사각형 40,000개의 무작위 배열」이라는 캔버스와 실크스크린 작품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기하학적 추상의 전통과 계획된 작별을 고하면서 이런 작품들은 그의 그림 경력에서 전환점이 된다.
리트머스 시험지로서의 이브 클랭
파리 청년파의 여러 예술가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클랭의 작품, 특히 그의 모노크롬은 파리 미술계의 분수령이 됐다.
'파리 청년파'는 전쟁 직후에 피에르 솔라주, 장 바젠, 알프레드 마네시에, 비에라 다 실바, 세르게이 폴리아코프, 장 에스테브, 브람 판 펠더, 한스 아르통과 같은 부류에 의해 주창됐고, 그다음으로 일군의 아카데미 모방자 집단이 열심히 따랐던 추상의 유형을 지칭하기 위한 1950년대에 수차례 사용된 포괄적인 용어다. 파리 청년파의 이론과 작업 방식은 초창기 칸딘스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즉흥'이라 불리는 작업은 화가 '내면'의 충실한 초상으로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파리 청년파 예술가들은 그의 회화 세계의 주인으로서 자리 잡은 데카르트적인 주체였다. 심지어 표현주의적 작품에서도 파리 청년파 화가들은 최신 고전풍의, 전반적으로 상당히 구축적인 입체주의에 의해 지배된 예술 교육의 소산이었다.
클랭은 파리 청년파에 저항한 유일한 예술가도 아니었고 최초의 작가도 아니었지만 파리청년파의 연극적 행위, 자기 과시적인 전술을 차용하는데 가장 뛰어났다.
앙타이의 전면적인 방식
시몬 앙타이(Simon Hantaï, 1922~)는 전면성이 지표성의 탐구와 밀접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렐레가 빌의 유산과 씨름하면서 이런 구조를 만나게 됐고 마르탱 바레가 파리 청년파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앙타이가 극복하고자 했던 적은 초현실주의였다. 앙타이의 회화적인 작업은 항상 자동기술법의 문제와 통제의 불가능함을 즐겼고, 가장 성공적인 앙타이의 작품들은 펼쳐지는 순간 보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순수한 기쁨을 선물했다.
모렐레, 바레 그리고 앙타이는 그들이 배웠던 많은 기술들을 버렸다. 이 기술들이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의 회화적 등가물(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나는 '한쪽 구석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다른 쪽 구석에 무엇인가를 해서 균형을 맞출'(스텔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전환된다.)에 수반하는 구성과 내면성의 신화를 과시할 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전통적인 배경에 기대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기술을 버린다고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또 한 사람의 젊은 예술가에게 역전을 당했는데, 그가 바로 개념미술의 국제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다니엘 뷔랭이다. 1965년 중반까지 뷔랭의 거대한 캔버스들은 거의 모두 채색된 줄무늬의 규칙적인 패턴과 단조로운 색면을 대비시켰고 마티스의 장식성이 부활하는데 강력한 구실이 됐다.
1966년 초에 뷔랭은 표준적인 한 쌍의 패턴을 채택했다. 그는 작품마다 각각의 너비(8.5센티미터)가 일정한 흰색과 단색의 줄무늬를 엇갈리게 하는 이 방식을 이후 계속 사용했다. 그와 유사한 작업을 하는 올리비에 모세, 다니엘 파르망티에, 니엘 토로니와 같은 세 명의 미니멀 작가들과 함께 BMPT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작품에서 변함없이 반복될 하나의 형태를 선택했다. 1967년 1월 3일 《청년 회화전》이 열리는 동안 최초로 합동 전시를 가졌는데 그것은 마티외를 패러디한 클랭을 다시금 패러디한 것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온종일 "뷔랭,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는 여러분이 똑똑해지기를 권합니다."라는 슬로건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고 그런 가운데 이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작품을 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자 그들은 "뷔랭,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는 전시하고 있지 않다."라고 쓴 현수막만 벽에 남겨 둔 채 자신들의 작품을 챙겨서 전시장을 완전히 떠났다. '청년 회화'는 완전히 끝났으나 이로써 제도 비평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 1년 남짓 후인 1968년 5월의 문화혁명은 BMPT의 게릴라 전술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든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 > 1960년대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8년b 개념미술, 세스 시겔롭, 로버트 모리스, 댄 그레이엄, 조지프 코수스 (0) | 2019.08.01 |
---|---|
1968년a 베셔 부부, 신즉물주의 사진, 전후 독일미술 (0) | 2019.07.31 |
1967년b 아르테 포베라, 자니스 쿠넬리스, 피노 파스칼리, 파졸리니, 폰타나, 만초니 (0) | 2019.07.29 |
1966년b 루이즈 부르주아, 에바 헤세, 쿠사미 야요이 (0) | 2019.07.27 |
1967년a 로버트 스미스슨, 브루스 나우먼 (0) | 2019.07.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