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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8년a 베셔 부부, 신즉물주의 사진, 전후 독일미술

by 책방의 먼지 201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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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선진 미술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던 두 개의 미술관, 아인트호벤의 반 아베 미술관과 묀헨글라드바흐의 압타이베르크 미술관에서 베른트 베셔와 힐라 베셔 부부의 전시가 열린다. 여기서 그들은 개념주의 미술과 사진의 선구로 주목받는다. 

 

베른트 베셔(Bernd Becher, 1931~)와 힐라 베셔(Hilla Becher, 1934~) 부부는 그들이 1957년에 시작했던 사진 프로젝트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프로젝트는 당시 등한시되거나 소멸할 위기에 놓인 유럽의 낡은 산업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베셔 부부의 프로젝트는 변증법적 특성을 갖는데 그 변증법이란 강박에 가까운 철저한 기록 의지와 그 기록을 영구히 하려는 욕망, 그리고 깊은 상실감과 대상의 시공간적 소멸을 막을 수 없다는 멜랑콜리한 통찰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의 사진적 전회:1928~68년

여기서 먼저 두 개의 사진 프로젝트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베셔 부부를 탄생시킨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핵심적이었던 독일 신즉물주의 사진이며, 다른 하나는 베셔 부부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수용의 문맥과 관련된 사진 프로젝트이다. 

부분적으로 베셔 부부의 초기 사진 작업의 일부분은 건축을 발굴하는 구성 이미지들이었다. 시대에 뒤처진 듯한 기이한 몽타주 형식으로 된 이 이미지들은 보이는 세계를 실증주의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세부를 최대한 제공한다는 사진 본연의 약속을 보여 준다. 그러나 베셔 부부는 포토몽타주를 상기시키는 이런 이미지들에 한계를 느꼈다. 왜냐하면 포토몽타주는 그들 작업의 역사적 원류가 됐던 신즉물주의 사진에 잠재된 보수성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타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베셔 부부는 구성 사진을 포기하는 대신 모더니즘 사진의 두 가지 법칙, 즉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으로 제작한 단일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속 혹은 수열 법칙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진을 배열했다. 하나는 그들이 '유형학'이라 불렀던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펼침'이라고 불렀던 방식으로 하나의 특정 구조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일련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베셔 부부의 작업이 위에서 요약했던 것 이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 이유는 그것이 바이마르 아방가르드를 역사적으로 계승하려던 몇 안 되는 전후 독일의 미술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바이마르의 전통 대신 50년대와 60년대 미국 네오아방가르드와의 연계를 꾀했던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같은 대다수의 전후 서독 작가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베셔 부부는 역사적 중요성과 구조적 기능적 충실함 그리고 그 미학적 지위를 드러내는 건축 유형에 대한 관심을 명백히 함으로써 산업 폐기물을 낭만적으로 만들거나 예술적 실천과 산업적 실천의 관계를 환원적으로 이해하는 일에 반대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술적 충동만큼이나 건축물 보존주의자적 충동도 중요한 작업 동기였다. 완전히 소멸될 위기에 있던 산업 건축물을 선별 구조해 내려는 건축물 보존주의자들의 '산업고고학'이 성립 시기부터 베셔 부부의 작업에 자극을 받으며 새로운 학문 분과로 부상했다.

 

수열성에서 장소 특정성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모더니즘 건축가의 작가 미학에 반대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베셔 부부의 「익명의 조각들」 또한 산업디자인의 익명성이 작가의 개성에 대한 주장만큼이나 진지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1968년 바로 그 시점에 '르 코르뷔지에-신즉물주의-베셔 부부'라는 모더니즘의 계보가 형성될 수 있었고, 이들은 모두 집단성, 익명성, 기능주의를 핵심적인 예술 가치로 여겼다. 

베셔 부부의 작업이 물리적 구조물을 사진 기록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미니멀리즘은 물론 개념주의와도 연관됐다. 특히 그 이미지들이 수열적으로 배열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숙련된 기술 즉 재숙련화를 강조한 베셔 부부의 작품은 탈숙련화로 정의되는 개념주의 사진과는 구분됐다. 그들은 가능한 한 양질의 흑백사진을 제작한다는 목표를 부활시키는데 주력해 정면 사진을 얻어 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최대한 원상태에 가깝게 대상을 제시하고자 해 작가 개인의 시각이 배제된 듯 보인다는 점에서 베셔 부부의 작업은 신즉물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며 이것으로부터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베셔 부부가 바이마르 신즉물주의와의 연속성을 주장하면서도 독일 네오아방가르드를 전후 미국 미술과 연계시키는 일에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당시 독일 표현주의를 부활시키려 했던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시도와 유사했다. 그러나 이런 연속성을 주장하는 예술작업에는 문제가 있다. 예술적 작업과 전략들이 지속적으로 다른 작업과 전략에 자리를 내줌으로써 그 자체로 역사적 현상이 되는 동시에 그 가치가 연동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20년대의 '신즉물주의'사진이 60년대 사진에 유효한 모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회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서 비롯된 역사적 단절을 초월하려 했던 미술 작업들은 1946년 이후의 모든 문화 실천이 그런 단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다. 이런 측면에서 베셔 부부의 연속성에 대한 주장은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이런 연속성을 주장하지 않았던 동시대 독일의 다른 작업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애도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 속에서 작품은 억압적 기구의 징후를 드러낸다. 베셔 부부의 사진을 잠식하는 멜랑콜리아가 거의 병적으로 주체를 억압하면서 산업 폐허에만 초점을 둔 데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를 멜랑콜리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작품의 사회 역사적 차원이 제거됨으로써 건축적인 것이 순수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트 잔더를 제외한 신즉물주의 미술가들이 대상을 끊임없이 미학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탈역사화의 움직임은 신즉물주의 사진 자체를 규정하는 특징이 됐다. 

 

베른트와 힐라 베셔 부부 「냉각탑 Cooling Towers」 1993
베셔 부부 「8개의 시점에서 바라본 집 Eight Views of a House」 1968~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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