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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9년 포스트미니멀리즘, 리처드 세라, 로버트 모리스, 에바 헤세

by 책방의 먼지 2019.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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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과 런던에서 열린 《태도가 형식이 될 때》전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의 발전 양상을 살펴본 반면, 뉴욕에서 열린 《반환영: 절차/재료》전은 프로세스 아트에 초점을 맞춘다. 이 프로세스 아트의 세 가지 주요한 양상이 리처드 세라, 로버트 모리스, 에바 헤세에 의해 정교화된다. 

"특수한 사물"로 관심을 돌린 미니멀리즘의 등장은 매체 개념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음을 의미했다. 도널드 저드가 선언한 것처럼, 이제 "미술 작품은 단지 흥미롭기만 하면" 됐고, 따라서 "어떤 재료든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재료들과 함께 새로운 제작 절차들이 나타났고 이 절차들은 주로 프로세스 아트, 아르테 포베라, 퍼포먼스, 신체 미술, 서치,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탐구됐다. '포스트미니멀리즘'이라 불리는 이런 작업들은 미니멀리즘의 원리를 확장시키기도 했지만 대개 미니멀리즘에 반대했다. 

양상은 서로 달랐지만 포스트미니멀리즘의 모든 작업은 매체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절박함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미술 작품의 물질성에는 한계가 있는가? 즉 작품의 시각성에 있어 영도(zero  degree)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미술가의 의도는 제거될 수 있으며 최소한 결과에서는 원래 의도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각의 운동 내부에서조차 갈라졌다. 몇몇 개념 미술가들이 미술을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 리파드의 유명한 용어)했다면 대부분의 프로세스 아트들은 그것을 철저히 재물질화(rematerializ)했다. 

예를 들어 의도로 보자면 어떤 프로세스 아트 미술가들은(에바 헤세의 라텍스로 만든 피조물이나 린다 뱅글리스의 폴리우레탄 생장물) 새로운 재료들을 단지 표현적인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 정도로 보았지만, 다른 미술가들(모리스의 펠트 조각을 늘어뜨려 걸어놓거나 세라의 납이 뿌려진 형태)은 작가의 개입 없이도 재료 고유의 속성을 자동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작가의 의도를 둘러싼 이런 분열은 부분적으로 뒤샹에 대한 서로 다른 독해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그 하나가 레디메이드를 선언적인 선택 행위로 보았다면("나는 이 변기를 미술 작품이라 명명한다.") 다른 하나는 그런 선택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로서 보았다.(뒤샹이 주장했던 것처럼 "시각적 무관심이라는 반응...... 완전한 무감각")

 

동기에 대한 탐색

이런 두 가지 '포스트매체'적 양상은 프로세스 아트와 관련된다. 첫째로 전통적인 매체는 제한적이기는 해도 제작과 의미에 대한 실천적인 규범들을 제공한다. 그런 제한이 없다면 미술은 자유롭기는 해도 자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모리스는 매체 특수성이라는 규범을 폐기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동기에 대한 탐색"이 프로세스 아트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라는 작품이 형성되는 동기를 자신이 제안한 "재료의 논리" 속에서 찾았으며, 모리스는 "제작 행위의 체제"속에서 찾았다. 둘 다 다른 방식으로 미술을 규정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프로세스 아트가 강조한 첫 번째 지점이다. 두 번째 강조점은 프로세스 아트가 전통적인 매체에 대한 비판적인 개입을 지속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프로세스 아트의 첫 번째 임무는 형식과 내용, 그리고 수단과 목적이라는 전통적인 대립을 극복하는 것으로서(전자는 리파드에 의해, 후자는 세라와 모리스에 의해 강조됐다.) 제작물 내에 작업 과정을 드러내는 것, 아니 제작물로서 작업 과정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두 번째 임무는 형상과 배경, 즉 수평적인 장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나는 수직적인 이미지라는 또 다른 전통적인 대립을 극복하는 데 있었다. 이미 리파드는 《기이한 추상》전에서 이와 같은 장 효과를 "비논리적인 시각적 혼합물, 혹은 시끌벅적한 광경"으로 묘사했다. 이는 프로세스 아트의 세 번째 임무에 대한 축약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해체돼 있지는 않더라도 어지럽혀져 있으며, 관람자의 시선은 혼란스럽지 않을지라도 분산돼, 신체에 대한 비구상적인 새로운 방식의 암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프로세스 아트가 특정적으로 갖는 재료의 논리, 전시의 장 효과, 환상을 산출하는 신체성이란 세 가지 차원은 각각 세라, 모리스, 헤세에서 가장 탁월하게 드러났다.

 

로버트 모리스는 미니멀리즘 작품의 자의적인 배열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리스는 통일성이라는 미니멀리즘의 규범을 작품을 넘어 그 제작 방식에까지 확장시켰고 이를 통해 폴록은 도구와 재료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통해 제작 과정의 작품을 "최종적 형태의 부분으로" 종속시킨 대표적인 미술가로 제시되었다. 모리스가 폴록에게 물려받은 이상은 작품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그 과정이었다. 흩어 놓기의 제스처는 모리스, 세라, 사렛, 르 바에게 배열에 저항하고 엔트로피에 속박된 것으로서 작품의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력이 (탈)구성을 위해 동원됐고, 우연이 허용되고 비결정성이 수반됐다. 회화와 조각의 수직성에 대한 이런 공격은 미술 작품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최소한의 조작을 통해서 거의 쓰레기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이 미술작품은 '흩어 놓기'가 '분변적인 것'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까지 해체됐다.

로버트 모리스 「무제(타닌 펠트) Untitled(Tan Felt)」 1968

 

시각의 '탈변별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도 회화와 조각에 존재하는 관례적인 형상-배경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지에 저항하고 주관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그의 퍼포먼스는 당시 미니멀리즘 무용이나 음렬 음악과 유사했다.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세라에게도 과정은 "서로 분리된 사물을 시간을 통해 경험되는 조각의 장 속으로 용해"시킴으로써 장 효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세스 아트가 조각을 넘어서는 방식이 아닌, 조각을 현대 사회의 산업적 조건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라 보았다. 설계하고 제작하고 조립해 만들어 놓는 각각의 과정을 전면에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의 '지지체(prop)'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과정은 납과 같은 재료의 내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조각의 '실용적 원칙'이 건축하기라는 점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리처드 세라 「1톤짜리 지지체(카드로 만든 집) One Ton Prop(House of Cards)」 1969

그는 프로세스 아트가 조각을 넘어서는 방식이 아닌, 조각을 현대 사회의 산업적 조건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라 보았다. 설계하고, 제작하고, 조립해 만들어 놓는 각각의 과정을 전면에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의 '지지체(prop)'작품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과정은 납과 같은 재료의 내적인 특성들(무게, 밀도, 강도)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조각의 '실용적 원칙'이 건축하기(Building)라는 점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세라는 관람자들을 움직이게 만들기보다는 관람자가 보는 방식을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두어 응시하는 것에서 시각장을 "우두커니 바라보는"것으로 바꿨다. 모리스에 따르면 미니멀리즘이 공간적 환영주의를 제거한 것이라면, 포스트미니멀리즘은 시각을 "탈변별화"해서 "작품이 구조적인 특징"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여기서는 과정이 물질성보다는 시각성에 관련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정과 결부된 시각성은 재료를 통해 물질화되는 동시에 공간 속으로 흩어지는 것으로서 주체로부터 탈중심화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각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그 세계가 또한 우리에게 응시를 되돌려 준다는 점을 가리키기 위해서인 양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함축은 자크 라캉의 "응시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개념과도 일치한다. 

에바 헤세 「걸기 Hang Up」 1966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이 시점에 에바 헤세는 특히 독창적이었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처럼, 헤세도 관례적인 형상-배경 관계를 비틀어 버림으로써 신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초기에 헤세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을 위해 회화와 조각 사이에 공간을 설정했다. 「걸기」에서 액자는 회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관람자의 공간으로 부조리하게 튀어나온 고리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텅 비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회화의 관례들(틀 지워지고, 채색되고, 걸려 있는)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제거한다. 이런 방식으로 회화는 자체의 강박 관념을 지닌 사물로 변모하는 듯하다. 헤세의 특징은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어두운 재기 넘치는 유희라 할 수 있는데, 라텍스, 유리섬유ㅡ 삼베로 된 그녀의 구조물들은 신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연상시킨다. 세라와 모리스는 주로 우리의 신체를 사물이나 장과 현상학적으로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형태의 순수성이나 안정성을 동요시킨다. 그러나 헤세에게 이와 같은 동요는 심리학적인 층위에서 일어난다. 마치 그녀의 작품과 낯선 감정 이입의 상태에 놓인 우리의 신체가 내부로부터 동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헤세의 작품은 거울 속에서처럼 아름다운 모습, 즉 이상적인 신체-에고를 우리에게 반사시켜주는 회화나 조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것일 수도 있는 욕망과 충동에 의해 "탈영토화 된" 신체를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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