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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2년c 댄 플래빈, 칼 안드레, 솔 르윗

by 책방의 먼지 2019.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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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밀라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 러시아 미술 1863~1922」의 출판으로 인해,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알렉산드로 로드첸코의 구축주의 원리들에 대한 서구의 관심이 되살아난다. 댄 플래빈, 칼 안드레, 솔 르윗 등과 같은 젊은 미술가들이 이 원칙들을 다른 방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낸다. 

 

불완전한 기획들

조각에 대한 몇몇 유물론적 원칙들은 50년대 마크 디 수베로의 거대한 아상블라주나 데이비드 스미스와 앤서니 카로의 용접 구축물을 통해 복원됐다. 그러나 도날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 댄 플래빈(Dan Flavin, 1933~1996), 칼 안드레(Carl Andre 1935~), 솔 르윗과 같은 패기 넘치는 젊은 미술가들은 곧 이 세명의 선배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즉 이 세명의 작품이 너무나 회화적으로 보였다. 

"자코메티나 데이비드 스미스의 후기 입체주의 같은 50년대 반초현실주의 작품에 대한 훌륭한 대안"을 찾던 안드레와 동료들은 타틀린과 로드첸코의 구축주의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안드레는 1962년에 "우리의 취향은 필요에 의해 지배된다."라고 언급했는데, 플래빈은 산업적인 재료의 채택, 제작 과정의 공개, 건축적 장소화를 선언했던 타틀린에게 매료되어 있었고, 안드레와 르윗은 구조물들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그것들을 거의 수열적으로 발생시키려 한 로드첸코를 좋아했다. 

'동일한 단위'에 대한 강조에는 그린버그에 도전하고 구축주의의 복귀를 복잡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뒤샹의 레디메이드라는 선례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의 레디메이드라는 모델이 수사학적 수단을 넘어 구조적인 수단으로서 재평가되었다. 1963년경에 이 미술가들은 전통적인 조각에 대한 두 가지 급진적인 대안, 즉 1913년에 서로에 대한 보완물로서 제시됐던 타틀린의 구축물과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결합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시대 특정적이었다. 안드레에게 있어 구축과 레디메이드의 결합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브랑쿠시는 형태에서는 비록 관념론적이었지만, 물질과 장소를 결합한 점에서는 유물론적인 조각 모델을 제시했다. 

한때 성상 복원사로 일했던 타틀린의 경우처럼, 플래빈 또한 성상에서 대안적인 그림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명백히 물질적이면서 영적인 것이기도 했다. 플래빈은 「v.타틀린을 위한 기념비」라는 경의를 표했다. 이 작품 제작하기 1년 전인 1963년 그는 회화 작업 없이 형광등의 퍼지는 빛만을 레디메이드 단위로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작업 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시도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인 「1963년 5월 25일의 시선」에서 그는 금빛을 내는 2.43미터 정도의 일반 형광등을 45도 각도로 벽에 설치했다. 구축주의와 달리 그가 사용한 산업적인 재료는 미래주의적인 것이 아닌 발견된 것, 즉 레디메이드였다. 그리고 뒤샹과는 달리, 플래빈에서 레디메이드는 단지 미술의 탈신비화나 탈물신화를 수행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사용된 전등을 "현대의 테크놀로지적인 물신"으로 간주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두 모순적인 원칙을 통합해버렸다. 하나는 미술작품을 물질화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빛을 빛으로 선언한고 그 물리적인 지지체(형광등 고정판)을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것은 미술 작품을 탈물질화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작품을 빛으로 비추고 공간을 색으로 젖게 만드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1963년 5월 25일의 시선」이 타틀린과 뒤샹에게 영감을 받았음에도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세속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브랑쿠시에게 한정된 듯이 보이는 이유다. 

 

댄 플래빈, 「The Diagonal of May 25, 1963 (to Constantin Brancusi)」, 1963

안드레는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플래빈보다는 즉물적이지만 단순히 실증주의적이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곧 구축주의적 방식을 '일종의 조형 시학'으로 정교화하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안드레는 벽돌이나 나무토막, 금속판 같은 주어진 요소들을 "공간을 생산하기 위해 결합"한다. 즉 조각을 장소로 재정의한다. 여기서 조각은 마치 형상의 흔적 없이 공간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구성의 여지를 없애 버린 단위체의 논리에 의해 구조화됐는데, 레디메이드를 구축주의적인 형식으로 바꿔 냈던 것이다. 즉 그는 주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재료, 구조, 장소 모두에 대해 스스로 말하게 했다. 

   

칼 안드레, 「등가(VII) Equivalent(VII)」, 1966

솔 르윗은 「매달린 줄무늬 구조」에서 매체들 사이의 공간, 즉 회화도 조각도 아닌 '부정적'조건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 조건을 바닥이나 벽에 다양한 각도로 나무판을 설치한 1964~65년 사이의 구축물에서 더욱 깊이 있게 탐색한다. 1967년에 그는 "미술은 실용적이지 않다."라고 함으로써 구축주의의 실용적인 측면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거리는 조각과 회화가 또다시 부정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1965~66년 '모듈 입방체' 연작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었다. 이것은 구축주의의 선례를 상기시키기보다는 개념미술에 대한 그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솔 르윗, 「매달린 줄무늬 구조 Hanging Structure withe stripes」, 1963
솔 르윗, 「모듈 구조 Modular Structure,」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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