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틀러에 대항해 일으킨 슈타우펜베르크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 20년이 되던 7월 20일, 요제프 보이스는 가짜 자서전을 출판하고, 서독 아헨에서 열린 '뉴 아트 페스티벌'에서 대중 폭동을 일으킨다.
1964년 여름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12~1986)는 1951~1956년 사이에 제작한 소규모의 드로잉과 조각 작품들을 독일 카셀에서 열린 《도큐멘타 3》에 전시했으며, 이 전시를 통해 대중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그해 연이어 일어난 세 차례 정도의 사건을 통해 보이스의 초창기 활동은 악명을 떨치게 됐으며, 결국 그는 전후 서독 재건 문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첫 번째로 꼽히는 주요 예술가가 됐다.
첫 번째 사건은 1964년 7월 20일 아헨 기술대학의 '뉴 아트 페스티벌'에서 벌인 퍼포먼스 도중 우파 학생들로부터 받은 공격으로 시작됐다. 그가 두 개의 커다란 비곗덩어리를 요리용 철판에서 녹이는 동안 사운드 트랙에서 '총력전'에 대한 대중의 진심 어린 지지를 호소하는 요제프 괴벨스의 악명 높은 베를린 스포트팔라스트 연설이 흘러나왔다. 이때의 충돌 경험은 보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태도를 정치화할 필요성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 계기를'만들었다.
두 번째 사건은 그의 가짜 자서진 <삶의 이력서/작품의 이력서(Lebenslauf/Werklauf)>의 출간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원 신화'를 꾸며 냈으며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행보를 신비스럽게 기술했다. 그는 사실 그가 주장하는 것만큼 그 자신과 작업 사이의 필연적 긴밀성이 없어 보이는 것을 연결시켰으며, 이런 방식은 이후 보이스의 예술 경력에서 전형을 이룬다.
얼마나 독일적인가?
보이스 작업을 유독 독일적으로 만든 것은 나치의 파시즘이 정신분석학에서 포토몽타주에 이르기까지, 메시아주의의 종말론적 사고에서 정통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바이마르 아방가르드 문화의 모든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초래된 아방가르드 전통의 부재로 인해 빚어진 기이한 절충주의였다.
보이스가 기억을 불러내는 미학을 발전시켰던 것은 무엇보다 공인된 부정의 미학에 반하는 일이었다. 다다의 레디메이드나 구축주의와 같은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의 급진성은 보이스의 손을 거치면서 단지 폐허나 유토피아적 잔해로서 돌아왔다. 보이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과거, 그 과거 아방가르드의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이 공공연히 찬양받는 상업 문화의 축적만큼이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브클랭과 앤디 워홀이라는 60년대 초 활동한 다른 두 예술가들과 함께 다양한 교차점들 위에, 그리고 전전 아방가르드와 네오 아방가르드를 구별해 내는 역사적인 결정적 변화들 안에 위치 지워진다. 그가 이런 위체에 있다는 점은 그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나, 그를 60년대 초반 이래로 끊임없는 독해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시도들은 한 예술품의 무한한 복잡성을 입증하기보다 일반 관객들과 해석 전문가들 사이의 '의미 있는' 문화 생산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증명해 준다.
이런 교차점 가운데 첫 번째는 특히 그의 퍼포먼스가 급부상하고 있는 스펙터클의 문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스펙터클의 문화란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고 20년대 예술가들이 그들의 관객에게 스캔들과 충격을 불러일으킬 당시 그들의 활동은 보통 사회적 혹은 정치적 도발로 인식됐다.
그는 최초로 스펙터클문화의 원리와 제의적 시각성의 전략들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그의 페르소나에서 통합해냈다. 일단 문화적 실천이 모든 유토피아적 그리고 정치적 열망으로부터 심지어 기호학적 혁명을 향한 야망으로부터 분리되자 필연적으로 네오 아방가르드는 스펙터클한 시각성의 배타적 기록으로의 전이를 완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교차점은 보이스 작업과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만나는 지점, 그의 작업과 동료들(특히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스트들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플럭서스 작가들)의 작업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데 넓게는 그와 오브제 세계의 관계와 좁게는 그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패러다임의 유산과의 관계와 관련된다.
이제는 더 이상 장인적 미술 작품의 진부함에 대한 산업 오브제의 해방적 반발을 주의 깊게 고민했던 뒤샹의 시대가 아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미 보이스가 왜 1964년 다시금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고 있다."라는 악명 높은 플래카드를 그림으로써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인터뷰/퍼포먼스에서 공개적으로 뒤샹의 유산을 거부했는지가 설명된다.
보이스는 '퍼포먼스'를 심령 치료와 굿의 거의 숭배 형식과 같은 신화로의 퇴보, 의례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과거 경험의 무의식적 상태를 현재의 극적인 혹은 그로테스크한 재현과 재결합시키고자 했다. 플럭서스가 퍼포먼스를 자기 구성, 참여 그리고 물신화의 조건에 대한 저항으로 정의한 반면, 보이스는 그것을 치료와 굿으로 정의함으로써 인식론적으로 보이스를 '샤먼-예술가'로 숭배하기에 이르게 했다.
예술 생산에 대한 보이스의 접근 방식이 제기한 중요한 이론적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발터 벤야민의 용어로 표현하자면)"아방가르드가 의례에 기생적으로 의존하던 예술을 해방시킨 것"이 넓게는 전후 문화적 상황 안에서, 좁게는 독일의 상황 내에서 역전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렇게 돼야만 할지 하는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구분하는 세 번째 요소는 역사적 기억에 대한 그의 작품의 구조적, 도상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64년에 일어난 마지막 사건은 자신의 첫 번째 진열장을 정리하기로 한 그의 결정이었다. 「아우슈비츠-제시」라 이름 지은 이 진열장은 기념 사당과 유리장의 중간쯤 위치한 것으로 「아우슈비츠를 위한 기념비」 창작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 보이스가 준비했던 여러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대체로 진열장에는 직접적으로 그 주제와는 명시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그의 초기, 그리고 보다 최근의 오브제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애브젝트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운 낯섦의 현전에 이르기까지 거만한 기독교 상징에서 명백한 조롱에 이르기까지 「아우슈비츠-제시」는 전후 독일 예술에 나타난 기억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적절하게 재현해야 하는 것의 불가능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간주된다. 보이스는 미학적으로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에피스테메를 종합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카타르시스적인 의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기억을 돕는 차원에 있어서 오브제를 적극 사용할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의 원시적이자 유사-과학적인 실증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에 따라 오브제의 조건을 순수한 물질이자 과정으로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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