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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14

[사건] 질서로의 복귀 프랑스 미술 뿌리로 여겨지는 고전적 근원으로 되돌아가자는 '질서로의 복귀'에 대한 요구가 퍼지자 입체주의는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복귀는 빠르게는 화가 아메데 오장팡과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1918년 출간한 「입체주의 이후」에서 가장 늦게는 1923년 「질서로의 복귀」라는 장 콕토의 글에서 언급됐다. 이렇게 질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주장들은 퇴폐적인 감성을 지닌 전쟁 전의 혼란스러움을 고전주의의 합리성으로 정화시킬 것을 요구했으며, 독일의 영향 때문에 프랑스 문화가 야만스러워지고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었다.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는 미술가들이 황금율과 고대 비율에 대한 이론에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피타고라스'가 될 것을 독려했다. 그들은 만약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에게 승리했다면" 그것은 감각적.. 2019. 9. 20.
[이론] 뒤샹- 로즈 셀라비 뒤샹이 「큰 유리」를 위해 그린 습작 중 하나가 「녹색 상자」에 실렸다. 그 상부 영역에는 '마르(MAR)', 하부 영역에는 '샐(CEL)'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이렇게 (마르+셀=마르셀) 뒤샹은 「큰 유리」의 주인공들과 개인적으로 동일화하면서 여성적 페르소나를 가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뒤샹은 피에르 카반(Pierre Cabanne)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반 : 제가 알기로, 로즈 셀라비는 1920년에 태어났습니다. 뒤샹 : 실제로 제가 원했던 건 정체성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이름을 갖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죠. 그런데 특별히 호감이 가거나 맘에 드는 유대인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성을 바꾸면 어떨까? 그러자 일은 훨씬 .. 2019. 9. 19.
1918년 마르셀 뒤샹(Marchel Duchamp), 지표,「큰 유리」,「너는 나를/나에게」 ▲ 뒤샹이 마지막 회화 작품인 「너는 나를/나에게」를 완성한다. 여기서 뒤샹은 자신의 출발점이 됐던 우연의 사용, 레디메이드, '지표'로서의 사진 개념 모두를 집약한다. 뒤샹이 1915년부터 제작한 「그녀의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는 1923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1911~15년에 뒤샹이 남긴 노트를 보면 그가 이 작품의 개념적 윤곽을 잡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이 노트들을 「녹색 상자」(1934)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 우리는 「큰 유리」에서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유리 안에 매달린 사물들의 강력한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삼차원 환영을 주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그리고 암시적으로는 그것들을 포함하는 공간)의 윤곽을 그리는 데.. 2019. 9. 18.
1917년 몬드리안 ▲ 피에트 몬드리안이 2년 동안의 집중적인 연구 끝에 추상을 향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곧이어 최초의 아방가르드 잡지 이 출간되어 미술과 건축의 추상 운동에 이바지한다. 1914년 7월 가족을 방문하러 네덜란드를 찾은 몬드리안은 때마침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5년 동안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1912년 초 파리로 처음 떠났을 때 하나의 목표는 입체주의에 정통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혁신적으로 콜라주를 도입한 이 운동이 최근 방향을 수정했으며 재현 기호로서의 위상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아 1910년 여름으로 돌아갔다. 입체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해였던 1910년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자신들이 완벽하게 추상적인 그리드를 그리기 직전까지 갔음을 깨닫고 뒷걸음.. 2019.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