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이 「큰 유리」를 위해 그린 습작 중 하나가 「녹색 상자」에 실렸다. 그 상부 영역에는 '마르(MAR)', 하부 영역에는 '샐(CEL)'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이렇게 (마르+셀=마르셀) 뒤샹은 「큰 유리」의 주인공들과 개인적으로 동일화하면서 여성적 페르소나를 가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뒤샹은 피에르 카반(Pierre Cabanne)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반 : 제가 알기로, 로즈 셀라비는 1920년에 태어났습니다.
뒤샹 : 실제로 제가 원했던 건 정체성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이름을 갖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죠. 그런데 특별히 호감이 가거나 맘에 드는 유대인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성을 바꾸면 어떨까? 그러자 일은 훨씬 더 간단해졌습니다. 그렇게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은 탄생하게 됐죠.
카반 : 당신은 자신의 성을 바꾸느라 여장한 모습까지 사진으로 찍게 됐군요.
뒤샹 : 사진을 찍은 건 만 레이였죠.
1923년 뒤샹은 「유리」 작업을 중단하고 새로운 성격을 가진 예술 기획에 착수했다. 그는 "로즈 셀라비, 정밀 안과의"라고 이름과 직업이 인쇄된 명함을 제작했다. 그가 '안과의사'로서 제작한 작품으로는 회전하는 광학적 원반(「회전 반구」나 「회전 부조」)과 영화(「현기증 나는 영화」)가 있다. 먼저 로즈 셀라비의 작업은 칸트 미학에 따르면 예술 작품으 보편적인 목소리로 작품을 감상하는 다수, 다시 말해 작품을 보기 위해 모인 모든 관람자의 동시적 시점을 승인하는 집합적인 시각 공간에 열려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뒤샹의 '정밀 광학'은 그의 설치 작품 「주어진」의 문에 난 구멍들처럼 한 번에 단 한 명의 관람자만 허용한다. 광학적 환영에 기초한 이 작품들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정확한 위치에 있는 관람자에게만 허용된 시각적 투사였다. 일련의 인쇄된 카드로 이뤄진 '회전 부조'가 회전하기 시작하면 다소 비뚤어진 동심원들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원의 중심으로 수축한다. 때로는 환영적인 공간에서 깜박이는 눈이나 가슴으로, 수족관을 배회하는 발랄한 금붕어로도 보인다. 어떤 때는 수족관의 마개가 빠져 이내 하수구로 쏠려 들어가 버리는 금붕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로즈로 변신한 뒤샹과 그녀의 작업은 기계적인 「독신자 기계」나 「초콜릿 분쇄기」에 대한 뒤샹의 관심이 광학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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