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총체예술(Gesamkunstwerk)'로 정리했다. '총체예술'은 소리, 볼거리, 이야기를 포함하여 모든 감각이 일관성 있게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매체 자체가 지니는 경계를 확인하고, 그 경계 속에서 가능한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반모더니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바그너가 추구한 진정한 총체예술은 완성되지 못한 채 다른 나라의 지휘자와 다른 형태의 극장으로 넘어갔다. 20세기 전반부 동안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연출자였던 세르게이 댜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는 시각적 스펙터클이 풍부한 화려한 구성에서 자신의 아방가르드적 재능을 뽐냈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에릭 사티부터 다리우스 미요,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 등이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다. 장 콕토는 1919년 자신의 발레 작품 「퍼레이드(Parade)」를 위해 피카소의 협조를 구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댜길레프와 피카소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알기로 파리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서로를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예술적 우파와 좌파가 있는데, 사실은 둘은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댜길레프를 모던 회화로, 피카소를 필두로 하는 모던 화가들을 '발레'라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학으로 바꾸는 문제였다. 즉 입체주의자들에게 파이프와 담배, 기타, 낡은 신문이라는 몽마르트르의 전설들을 포기하도록 설득해 고립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 사치와 향락의 취향에 맞추는 중도적 해결책의 발견, 심지어 전쟁 이전에 붐을 이루었던 프랑스의 '사치스러움'에 대한 숭배의 재발견 ...... 그것이 발레 「퍼레이드」의 역사였다.
콕토가 언급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학"은 티파니 램프나 동양적 실내장식만큼 화려하고 반짝이는 멋스러운 아르 누보 구성이었다. 그러나 「퍼레이드」에서 피카소와 사티는 발레 뤼스의 디자이너 레온 박스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화려함을 향한 욕망을 거부하고 입체주의의 금욕주의적이고 단조로운 무대와 의상을 내놓았으며 "혼혈아", "독일 놈"과 같은 모욕적인 말에 질겁하는 관객들에게 타자기 소리와 유명한 민요를 들려주었다. 유행에 민감하고, 이따금씩 타락하는 고급문화의 취향을 잘 이해하는 데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콕토의 모토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퍼레이드」에서 콕토와 댜길레프는 확실히 너무 멀리 나아갔고 샤브리용 백작부인, 샤비네 백작부인, 보몽 백작부인 같은 후원자와 관객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레 단원들은 자신들이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야심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롤프 드 마레의 연출작 「수에도와(Suedois)」에서 프랑시스 피카비아가 의뢰받은 '휴관'이라는 표지판 디자인은, '공연 취소'를 의미한다는 것 자체로 관객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관객석을 바라보는 300개가 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구성된 피카비아의 장치는, 매혹적이고 현란하며 가학적인 분노 속에서 막이 내릴 때 일제히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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