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운동의 뼈대를 형성한 <초현실주의 혁명>(이하 <LSR>)은 1924년부터 10년간 발행됐다. 1929년 12호가 발간된 후 이 잡지는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Le surréalisme au service de la révolution)>(이하 <LSASDLR>)에 밀려났으며 <LSASDLR>은 또다시 미학적으로 훨씬 과감했던 <미노토르(Minotaure)>에 의해 퇴색됐다.
초기의 <LSR>은 앙드레 브르통과 초대 편집장 피에르 나빌 간의 내부 논쟁으로 분열됐다. 나빌은 보란 듯이 19세기 대중과학 잡지 <라 나튀르(La Nature)>를 표지 모델로 삼았는데, 잡지가 게재하려던 다큐멘터리적 소재(꿈의 해석, "자살이 해결책인가?"와 같은 문제)에 과학 잡지의 '실증주의적 성향'이 부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빌은 여러 지부를 거느린 공산당 본부를 따르려는 듯 잡지 발행 업무를 담당한 사무소를 초현실주의 '중앙 본부'라고 불렀다. 중앙 본부에 모인 회원들의 모습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을 콜라주한 작품이 <LSR> 창간호(1924년 12월호) 표지를 장식했다. 사진이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나빌의 관심이 익명적이고 대중적인 이미지에 있었을 뿐 아니라 예술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르통이 편집을 맡으면서 「초현실주의와 회화」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4회로 구성된 이글에서 피카소 작품을 포함한 초현실주의 미술은 미로, 아르프, 마송 등의 동시대 미술의 기원으로 설명된다. 그렇다고 잡지의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브르통은 샤르코의 환자들의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히스테리 발견 50주기'를 기념했다. 그의 제2의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계기로 <LSADLR>은 <LRS>을 계승하게 됐다. 이 선언문을 통해 브르통은 중앙 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조르주 바타유와 그의 급진적인 잡지 <도퀴망(Documensts)>에 동조한 사람들을 포함한 운동의 원년 멤버 대다수를 축출했다. 표지부터 그 관심 영역이 순수미술은 물론 민족지학, 고고학, 대중문화임을 표방했던 <도퀴망>은 나빌의 '취향 혐오'를 변형한 바티유의 무정형적인 것의 탐색을 기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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