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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20년대 노트

1924년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초

by 책방의 먼지 2019.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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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브르통이 창간한 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을 계기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초가 마련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운한 기운이 감돌던 때, 프랑스의 젊은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서로 연관된 두 개의 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하나는 그가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서 전쟁의 충격으로 신경증을 앓던 환자들을 감호하는 간호병으로 복무하게 된 일이었고, 또 하나는 언제나 반항아로서 부조리한 삶을 지지했던 자크 바셰(Jacques Vaché)를 통해 다다의 감수성을 처음 접하게 된 일이었다. 브르통이 무의식, 쾌락 원칙, 증상과 꿈의 표현 가능성, 거세 공포, 심지어는 죽음 충동과 같은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열렬히 수용하게 된 것은 외상성 신경증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게다가 미리 대비할 겨를이 없이 일어나는 외상의 본성은 바셰의 부조리주의적 입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삶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충격의 연속이라는 생각은 브르통과 바셰에게 있어 일종의 영화 구경 같은 것이었다. 영화관의 관람자는 자신도 모르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게 되며, 그 결과 전적으로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임의적인 시각적, 서사적 콜라주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몇 년 후 브르통의 시집 「자기장」(1920)에서 형상화된다. 필리프 수포와 함꼐 쓴 이 시집에서 브르통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했고, 그에 걸맞게 글의 구성 또한 '자동기술법'을 따랐다.

 

꿈의 해석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운동의 시도(선언문이나 잡지발간)가 시각예술의 미래를 밝혀 줬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초현실주의 혁명>의 초대 편집장 피에르 나빌은 노골적으로 순수미술 혹은 세련된 양식과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그는 '예술' 보다 대중문화 현상에 초점을 두었고 그에 걸맞게 잡지의 삽화 대부분을 사진, 그것도 익명의 사진으로 채웠다.

그러나 타고난 미학자 브르통은 그의 견해에 반대했다. 실제로 심리적 자동기술이 붓과 연필에서 유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브르통이 좋아한 작품들은 마송의 자동기술법적 드로잉이나 모래 낙서 그림,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흩뿌린 미로의 ' 꿈 그림', 정신 나간 듯이 문지른 에른스트의 프로타주처럼 통제를 벗어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브르통은 증상, 흔적, 지표 개념의 중요성도 강조했는데, 그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현실의 표면엥 불안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 너머 존재하는 다른 무엇의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적 양식 때문에 초현실주의는 많은 미술사학자들에게 모호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도상학적 방법론에 기반을 둔 학자들은 형식적으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그 내용에 초점을 맞춰 하나로 묶었다. 이런 경향의 연구에는 (여성의 음부나 이빨 달린 여성의 질처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와 연관된) 거세 공포나 물신숭배와 같은 정신분석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참호에서의 심리적 공황 상태나 전쟁 부상병의 일그러진 얼굴, 또는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원초적 상황으로의 퇴행처럼 참혹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반면 외관상 추상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미로의 작품과 에른스트의 중기 양식의 프로타주 작품)의 모더니즘적 측면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데 키리코와 르네 마그리트의 후기 작품 그리고 1930년 이후 살바도르 달리의 사진에 기반을 둔 꿈 그림들은 지극히 안이한 사실주의 양식을 취함으로써 반동적이고 반모더니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초현실주의를 이론화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브르통이 시도한 것처럼 실질적인 범주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그 범주들을 파헤쳐 그 구조를 남기는 방법이다. 그 결과 다양한 시각 양식에 따라 치환될 수 있는 일련의 형식 원리(그중 하나가 중복(doubling) 기법이다.)가 도출됐으며 동시에 그런 범주들을 통해 정신분석학적이거나 사회사적인 문제를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해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객관적 우연"을 예로 들자면 그것은 "심리적 자동기술법"의 한 변수일 뿐 아니라 브르통이 초현실주의자로서 추구해 마지않았던 "경이로운 것"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된다. 

브르통의 묘사에 따르면 객관적 우연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몇가지 원인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번째 원인은 주관적이며 인간 삶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원인은 객관적이며 현실 세계의 사건으로 작용한다. 외견상 예기치 못한 이런 만남의 양편에는 일종의 결정론이 작동한다. 현실의 측면에서 볼 때 주체가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에 세계가 특정한 그 혹은 그녀를 지칭하는 '기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편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혹은 그녀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이런 기호를 따르도록 충동질한다. 무의식적인 욕망으로 인해 기호는 그렇게 구성되며 사후적으로 묘사된다.

 

호안 미로 「키스 The Kiss」1924

 

초현실주의의 기호 작용

만 레이 「앙드레 브르통의 슬리퍼-숟가락 Slipper-Spoon」 1934, for André Breton’s L'Amour fou「광란의 사랑」(1937)에서 복제

 

객관적 우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자전 소설 「광란의 사랑」(1937) 초반부에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브르통은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손잡이 아래 조그만 구두 조각이 달린 나무 숟가락을 구해 집으로 가져왔다고 이야기 한다. 브르통은 새로 구입한 숟가락이 연쇄적으로 새끼를 치는 구두들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언급한다.(숟가락의 우묵한 부분은 구두의 앞, 숟가락의 손잡이는 구두의 몸통, 숟가락에 매달린 구두 조각은 구두의 뒤축이 된다. 그리고 그 매달린 구두 조각에도 나름의 앞, 몸통, 뒤축이 있으며, 그 뒤축 역시 또 다른 구두를 포함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의 연쇄가 펼쳐진다.) 다시 말해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각 구두는 앞서 존재하는 구두를 재현한 중복판이다. 이런 구조에 의거해 하나의 대상은 거울처럼 다른 대상에 반영되고 다른 대상은 그 대상을 재현하는 중복 기능을 담당한다. 기호학적으로 접근한 브르통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작용이 기호를 구성한다.

이 지점에서 브르통의 생각은 매우 적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기호는 언제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재현 대상의 중복판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두-숟가락은 하나의 기호로 함몰한 세계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기호는 브르통 자신에게 부여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무의식적 욕망의 명령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호-사물을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인 사고와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사고의 부추김으로 브르통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나선 왕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곧이어 어떻게 브르통이 '광란의 사랑' 과 같은 주제를 떠올리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른다. 놀랍게도 그가 발견하게 된 모든 세부 사항들은 10년 전에 그가 썼던 자동기술법 시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그 이후에도 그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될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은 세계의 '기호'가 중복의 조건을 통해 구조화되는 방식과 동일하다. 프로이트는 이를 반복 강박이라 했고, 60년대에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그것을 기호학적으로 재해석하여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된다고 정식화했다. 그러므로 다시 중복하기(redoubling)는 무의식적 충동의 형식적 요건이 된다. 

 

만 레이 「무제」 1924, 잡지<초현실주의 혁명>에 게재됨

사진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완벽한 수단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대상을 '거울처럼 비출' 뿐 아니라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중복적이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는 이런 사진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이중노출, 샌드위치 인화, 동일한 이미지의 음화와 양화 병치하기 등과 같은 기법들을 활용했고, 이미지를 중복하여 몽타주함으로써 세계가 기호로 다시 중복된다는 관념을 구현했다. <초현실주의 혁명> 창간호에 게재된 만 레이의 사진들은 그런 중복 기법이 활용된 일례이다.

그러나 중복은 프로이트가 「두려운 낯설음에 대하여」(1919)에서 논했던 정신분석학적 내용을 포함한다. 유령들, 바로 그 두려운 낯설음(언캐니)의 것들은 살아 있는 것의 중복판이다. 살아 있는 신체가 생명 없는 것(자동인형이나 로봇 등, 때로는 인형 혹은 발작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동반된다.)에 의해 다시 중복될 때 비로소 그 신체는 유령처럼 두려운 낯설음의 것이 된다. 이런 상태가 유발되는 이유는 중복을 통해 처음 공포를 느낀 상태로 복귀하기 떄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프로이트도 말했지만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인 반복 강박을 상기시키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두려운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프로이트가 묘사한 두려운 낯설음에 대한 경험은 브르통이 객관적 우연을 위해 제시했던 방법과 묘하게도 겹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은 비의도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런 반복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 그 무엇을 숙명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우발적 사건이 발생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는 나쟈의 능력 때문에 브르통이 그녀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소설 「나쟈」에 나타나는 객관적 우연은 "통상적으로 실현돼 버리고 말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를 연상케 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현상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무한함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연관 짓는다.

실제로 객관적 우연은 초현실주의의 사진 작업과 미로의 '꿈 그림'의 공유점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사진과 마찬가지로 미로의 그림에서도 꿈꾸는 사람의 욕망 기호를 산출하는 색채의 흐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미로 자신 또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 제작된, 흰색 바탕에 매우 밝은 청색의 얼룩점을 배치한 미로의 특이한 그림만 보더라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위에 미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내 꿈들의 색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왼쪽 상단 구석에는 보다 큰 글씨로 "사진"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결국 이 그릶의 표면 그 어디에선가 현실과 무의식의 사슬은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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