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20년대 노트

1927년b 콘스탄틴 브랑쿠시

by 책방의 먼지 2019. 9. 30.
반응형

▲ 콘스탄틴 브랑쿠시가 스테인리스 스틸로 「신생」을 제작한다. 그의 조각 「공간 속의 새」를 둘러싸고 미국에서 벌어진 공판에서 고급예술과 산업 생산 모델 간의 경쟁이 본격화된다.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는 1907년 한 달 동안 프랑스에서 오귀스트 로댕의 50명의 조수 중 한 명으로 일하였다. 정확히 한 달 뒤 그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예술 산업화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접근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돌을 찰흙이나 석고 모형을 만드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깎기 시작했다. 이런 '직접 조각'의 미학적 정직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사용한 재료의 특성에 반응하며, 전통적 조각 제작처럼 찰흙 모형에서 돌이나 석고, 브론즈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개입되지 않는다. 둘째, 이처럼 재료를 직접 다루면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므로 복제를 할 수 없다. 직접 조각의 정서는 다른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는 점차 농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으며 턱수염을 기르고 노동자의 작업복과 단화를 신었다. 그의 고향인 루마니아 시골의 목각 전통은 그의 반제도적 입장을 강화시켰으며 그의 1914년 작업에서 아프리카 조각과 원시 조각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모더니즘의 역사적 흐름밖에 있었고, 작업에서 영원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데 집중했다. 

사실 브랑쿠시가 단순화와 순수성의 형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역사적인 맥락과 상관없는 것에 대한 탐구이다. 표면처리를 거의 안 한 채 이목구비가 암시되듯 표현한 원구 「프로메테우스」, 난자가 세포 분열하는 순간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한쪽 끝이 비스듬하게 잘린 달걀 형태 「신생 II」 등은 환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다. 브랑쿠시에 열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플라톤주의로 보았다. 예를 들면 에즈라 파운드는 그의 작품에 대한 초기 평론에서 "형태의 세계로 가는 마스터키"라고 칭찬하면서 브랑쿠시의 타고난 조각적 재능은 덩어리 초기의 물리적 상태로부터 형상, 즉 순수한 이데아를 해방시키는 재능이라는 전형적 해석을 내렸다.

 

「프로메테우스」 1911 대리석
「신생 II The Newborn II」 1927 스테인리스 스틸                        「태초 The Beginning of the World」 1924 브론즈

 

1911년 브랑쿠시는 브론즈로 「프로메테우스」를 만들면서 고도의 마감 처리를 처음 시도했다. 그는 꼼꼼하게 손으로 광택을 내서 표면을 거울처럼 반짝거리게 만들어 완벽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면에 광택을 낸 브론즈 작품 「장님을 위한 조각」(현재 「태초」라는 제목으로 불린다.)을 똑같이 광택 처리한 스테인리스 스틸평판 위에 놓으면 서로 거울처럼 반사하는 표면들은 '이데아'를 압축해서 반짝이는 표면 너머에 모아 놓은 효과를 낸다.

「공간 속의 새」에도 이와 동일한 마감 처리가 적용됐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1923년에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제작됐고 1924년에는 광택을 많이 낸 브론즈로 제작됐다. 이 조각의 섬세하게 길게 늘인, 깃털 같은 형태는 새의 몸체이기도 하고, 넓게 펼친 날개이기도 하고, 가벼운 비상이기도 하다. 이 조각에 집약된 동작은 아우라를 양보하지 않았던 로댕의 작업, 다시 말해 로댕이 직접 손으로 만든 전대미문의 무용수들(로댕의 밑에서 일하면서 로댕의 마술에 홀린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조수들)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브랑쿠시는 대리석과 브론즈를 문질러서 완벽하게 광택을 낼 조수들이 필요했고, 로댕처럼 많은 작품을 소형 '판본으로 만들곤 했다. 그의 작업은 영원성과 보편성을 띠기는커녕 양식 변천사와 흐름을 따랐으며 더욱 '수준을 낮춰' 돌고 도는 유행 양식에 합류했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로댕의 작업보다 훨씬 더 '예술 산업'에 영합했다.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 1927

 브랑쿠시가 비콩트 드 노아이유로부터 받은 작품 주문은 이런 연관성의 속내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노아이유는 자신의 별장 정원에 놓기 위해 「공간 속의 새」를 확대해 달라고 주문했다. 브랑쿠시는 이 조각을 높이 45.7미터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장 프루베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는 그의 '이데아'를 산업화에 내맡김으로써, 즉 아우라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복제성과 관련이 있는 광택 나는 대량생산용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미학적 태도를 스스로 비판했다. 표면은 고급 장식과 연결되자 순수성을 잃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연속적 작업은 그 자체로 일종의 산업적 방식이었다. 그는 형식을 더 과감하게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주제를 제한하면서 연쇄적인 작업을 해 나가고 있었고 1923년 형식 목록이 완성되자 사망할 때까지(1957년) 소소한 변형 작품들을 만들면서 이 형식을 반복했다.

한편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최근 구매한 「공간 속의 새」를 대규모 회고전을 위해 뉴욕으로 가져오려고 하자 미국 세관이 그 조각을 면세 품목인 미술품이 아니라 관세를 내야 하는 주방 기구, 즉 대량생산되고 유일무이하지 않은 레디메이드로 분류한 사건이 일어났다. 세관은 몇 주 뒤 뒤샹이 그가 소장한 브랑쿠시의 대형 조각을 갖고 뉴욕 항에 입국할 때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영향력 있는 미국 미술품 수집가들이 수차례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변호사와 미술 전문가들로 무장한 후원단이 1927년 10월에 소송을 제기하자 비로소 그 결정은 번복됐다. 법원은 브랑쿠시의 작품에 면세품의 자격을 주기 위해 예술의 변화를 인정했다.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소위 새로운 미술 사조가 전개되고 있다. 그 사조의 작가들은 자연의 사물을 모방하기보다 추상적 개념의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 그 물건은 조화로운 균형 잡힌 선으로 구성됐고, 그 물건에서 새를 연상하기는 어렵겠지만 관람하는 즐거움이 있으      며 상당히 장식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문 조각가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증거를 확보했으므로 ...... 이의를 인정하고 면세        통관의 자격이 있음을 평결한다.  

 

브랑쿠시 「공주 X」, 1915~!6

 

뒤샹과 브랑쿠시의 연관성은 산업 레디메이드와 '예술'은 신성한 개념이라는 정의가 서로 교하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둘 역시 순수와 불순이 서로 교합할 때 공유하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뒤샹이 산업적으로 객관적인 것과 에로틱한 것(「샘」, 「여성용 무화과 잎」, 「큰 유리」등의 전체 내용)을 결합한 것은 브랑쿠시가 추상과 리비도적인 것을 신비롭게 융합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공주 X」가 이 점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타원형의 가슴 두 개와 머리를 튜브처럼 구부러진 목으로 연결시킨 이 단순한 여인 토르소는 피카소를 비롯한 다른 작가들의 눈에는 남근으로 보였다. 이 작품은 음란하다는 이유로 1920년 앙테팡당전에서 전시가 거부됐다. 이의를 제기한 브랑쿠시는 계속해서 이런 연상을 강조하는 각도에서 이 작품을 촬영했다. 사실 그가 신체를 단순화하는 유형들은 결국에는 부분-대상의 논리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신체 전체는 정화된 하나의 신체 파편에 의해 환유적으로 표현되고 점차 생식기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이것은 우아하게 단순화된 남성 토르소 연작(1917~24)에 꼭 들어맞는다. 남성 토르소들은 재현된 남근과 배관의 연결 부위인 '굽은 관'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 있다. 이것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자가 창조하는 (남성) 신체의 도상학적 측면에서 재코드화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하나 것은 브랑쿠시의 '토르소'에서 남성을 나타내는 것은 '토르소' 전체가 나타내는 남근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페니스가 없는 유연한 신체 그 자체는 어느 모로 보나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공주 X」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양성화는 전지전능한 자가 재생을 상상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회피하는 남성 우월의 환상 같은 해석 방법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 재생은 지금은 불멸의 불사조로 해석되는 「공간 속의 새」와 처녀 생식을 해서 여성을 넘어서기 위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신생」과 더불어 브랑쿠시 작업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