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뤼셀에서 상업미술가로 활동하던 르네 마그리트가 파리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광고 기법을 활용한 그의 미술은 언어와 재현의 모호한 관계를 탐색한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는 브뤼셀에 있을 때 집 뒷마당 창고에서 상업미술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파리에서도 때때로 의뢰받은 책 디자인과 광고 업무를 병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일부 비평가들에게 그의 냉담한 재현 양식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재현을 구성하는 시각적 언어적 요소들 간의 관계와, 이런 요소들이 대상이나 관념을 환기시키는 상호작용(간섭)에 대한 마그리트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이후 그가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다수로 복제했던 의도 등은 이와 같은 상업미술 경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이것은 그가 왜 후일 그의 중요한 회화들을 여러 차례 복제품으로 제작하기를 원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간의 상호보완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대중문화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광고에 의해 부추겨진 상품에 대한 욕망은 유일무이한 대상보다는 다수의 복제품 중 하나에 대한 열망으로 대체된다. 발터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1936)에서 주장했듯이 그런 욕망은 "복제를 통해 유일무이한 대상"과 동등한 감각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일무이함, 그리고 거리두기라는 관념 그 자체(혹은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제거되면서, 상품 문화는 미디어 이미지의 유혹은 물론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하는 진풍경을 형성했다.
그러나 모든 초현실주의적 입장은 의도적으로 사전 제작과 대량 생산의 가능성을 회피한 것 같다. 그 대신 대상이 아무리 진부한 일상용품이라 할지라도 놀라움과 계시적인 힘(앙드레 브르통이 "객관적 우연"이라고 공식화했던)으로 재충전함으로써, 반복될 수 없는 충격의 순간을 얻고자 한 듯하다.
반복 강박
그러나 복제에 매혹을 느끼고 직접 실천했던 마그리트가 결과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순수성'을 훼손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 또한 가능하다. 그의 초기 회화 작품들은 여러 차례 복제되면서 서로 내재적인 관계를 구성한다. 실제로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애초부터 그의 작품을 지배했던 중복 형식에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런 중복 형식은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언캐니)이나 반복 강박 개념과 연관되어 시도됐던 초현실주의적 중복의 한 변형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의 느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 무엇의 회귀로 정의하면서, 이런 감정에는 죽음 충동의 반복 강박과 관련된 불안감이 수반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설음은 삶의 한가운데 출몰하는 살아 있지 않음(the non-living)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살아 잇는 죽은 자(the living dead)의 귀환이다. 이런 느낌으로 충만한 이미지 중 하나인 「인간 조건」에 등장하는 캔버스의 풍경화는 실제의 풍경에 겹쳐진다. 실제 풍경에 겹쳐진 재현된 풍경의 가장자리는 경계가 모호해서, 과거에는 투명하게 현실을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의 전능한 지위는 여기서 그저 실제와 닮게 그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런 재현의 이중의 죽음은 마치 거울을 통해 귀환하는 뱀파이어 마냥 살아 있는 현실 속에 출몰해 그 현실의 견고함을 위협하고 실재성을 박탈한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구체적 사례로 삼은 푸코의 분석은 "실물 학습" 그 자체이다. 실물 학습이란 교사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 이름을 적어 넣는 프랑스 초등학교 수업의 한 형태를 말한다. 이런 실물 학습의 경우 그 위력은 재현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이 종이나 칠판에 침전된 흑연, 혹은 백묵 가루라 할지라도, 화살이나 지시봉 마냥 멀리서 혹은 어디에선가 특정 사물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것( 그 사물)이다." 둘째, 한 쌍의 그림-설명에 기호화돼 있는 관계는 바로 복제로서의 이미지와 그것이 투명하게 전달하는 세계-내-사물 간의 진리 관계이다. 이렇게 '공통의 자리'는 지식의 토대로 작용한다. 푸코의 언급대로 이미지와 캡션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시하는 "그것은 거기에 있다. 하얀 페이지의 고적한 사막, 그 몇 밀리미터 내에, 거기서 모든 지시. 명명. 묘사. 분류가 이루어진다."
푸코에 의하면 '칼리그람'이라는 모더니즘의 전통은 공통의 자리의 진부함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그 진부함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비'에 대한 시를 쓰면서 비가 내리는 모양 그대로 그 시를 수직적으로 배치한 의도는 공통의 자리를 구성하는 두 부분을 보다 고차원적인 질서로 통합하여 비라는 단어가 새롭게 페이지에 새겨진 대상으로 사라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런 투명성은 무용하다. 왜냐하면 시를 읽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이 만든 이미지를 간과하며, 이미지를 읽는 동안에는 그 단어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그람이 가진 문제점으로부터 마그리트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미지의 배반」에서 발생하는 것 또한 일종의 "흐트러진 칼리그람"이기 떄문이다.
이미지는 물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 또한 직접 손으로 그려 넣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칼리그람적이다.(이런 결과는 마그리트가 대상을 제시한 방식이 진부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칼리그람은 흐트러지는데 그 이유는 동어반복으로 그림-시가 강조하는 것과 실물 학습의 진리 내용 모두가 단번에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 ㅈ가품에서 그런 해체가 가능한 것은 최소한 세 가지 의미로 작용하면서 관람자를 혼란에 빠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의 기능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 이것이라는 단어에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이것은 '파이프'라는 단어를 가리키면서 단어와 그림 사이에 존재하는 비유사성을 지시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 즉 이것이라는 단어를 가리키면서 이런 유형의 언어와 재현 간의 비유사성을 지시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실물 학습 전체를 가리키면서 실물 학습, 그리고 그것과 투명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가정되는 실재 세계 간의 비유사성을 지시하는가? 이 세 가지 비유사성 모두가 참이라고 할 때 이것이라는 단어를 모순적으로 구사하는 이와 같은 시도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은 언어로 기호화된 '진리 내용(truth)'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이것이라는 단어에 응축된 언어의 지시적인 측면은 더 이상 그 근원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푸코는 사물과 캡션을 이어주는 흰색 통로로 되돌아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 간극을 삼켜 버리는 여타의 갈리그람과 달리" 마그리트의 칼리그람은 "스스로가 묘사한 사물에 매달았던 덫을 다시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사라진 것은 사물 그 자체이다. ...... 닻은 공중분해됐다. 다시 말해 이미지와 텍스트는 나름의 무게를 가지고 각자의 위치로 떨어진다. 그것들은 더 이상 공통 배경을 갖지 않는다." 실재 세계의 모델인 사물이 그 뒤에 놓여 있는 진리-가치를 보증하던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사라졌다면 이제 남는 것은 허상적인 상황, 즉 원본 없는 복제품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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