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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20년대 노트

1920년 예술작업의 정치화, 포토몽타주, 한나 회흐, 라울 하우스만, 구스타프 클루치스

by 책방의 먼지 2019.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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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다다 페어가 열린다. 아방가르드 문화와 문화적 전통의 양극화로 예술 작업은 정치화되고 포토몽타주가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다. 

 

1920'년 6월 베를린에 있는 오토 뷔르하르트 박사의 갤러리에서 열린 다다 페어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기원을 가진 베를린 다다 운동이 대중 앞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행사였다. 전시가 아니라 아트 페어로 소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행사는 진열장 디자인이나 제품 발표회 차원에서 상품 디스플레이를 패러디했는데, 이는 전시의 구조와 출품된 미술 작품을 금전적으로 변형시키려 했던 다다 미술가들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이탈리아 미래주의 및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작업과 닿아 있는 베를린 다다는 전통적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한편, 아방가르드 미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지지할 것을 선언했다. 특히 지역에 기반을 둔 아방가르드였던 베를린 다다는 당시에 이미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 표현주의와 정반대 되는 지점에 있었다. 모든 것을 보편화하려는 표현주의의 인도주의 정신과, 정신성과 추상을 융합하는 데 초점을 맞춘 그들의 작업은 다다이스트들의 엄밀한 조사와 비판의 대상이 됐다.

 

다다: 소란과 파괴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 속에서 표현주의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측면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다다는 미학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융합하려는 표현주의에 저항해서 반미학의 모델을 구축했다. 그리고 미학적인 것을 신비적인 것과 동화시켜서 인간 경험의 보편성을 주장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여 예술 작업의 정치적 세속화라는 극단적 형식을 강조했다. 

 

한나 회흐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 배를 부엌칼로 가르다」 1919

1919년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한나 회흐(Hannah Höch, 1886~1971)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 배를 부엌칼로 가르다」에서는 포토몽타주 프로젝트를 형성하는 모호한 기법과 전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내러티브에서부터 순수하게 구조적으로 배치된 텍스트 요소에 이르기까지 회흐의 작업이 보여 주는 가능성들은 포토몽타주 자체의 변증법적 작용의 축을 이룬다. 이 작품의 도상적 내러티브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명 인사들(대통령, 내무장관 같은 정치인부터 문화계 인물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위계질서나 구성, 배치 방식과 상관없이 작품 전체에 흩어져서 '다다'라는 무의미한 단어들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텍스트 파편들과 섞여 있다. 

하트필드, 그로스, 회흐와 하우스만의 바이마르 진영과 로드첸코와 클루치스의 소비에트 진영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서로 연관돼 있었다. 첫째는 대중문화에서 사진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시각 세계에 사진이 광범위하게 보급됐음을 발견한 점이다. 둘째는 두 진영 모두 기존의 의미론적 체계를 벗어난 의미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시각적, 텍스트적 단일성을 파괴하고, 텍스트나 도상의 기의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가독성보다 기표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시공간적인 측면에서 경험의 균열과 불연속을 역설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가독성의 구조에 대한 공격의 배후에는 대중문화가 생산하는 상품 이미지와 광고가 조장하는 신화적 재현을 해체하려는 비판적 충동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포토몽타주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을 만들려는 그들 공통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 새로운 유형이란 일시적인 것, 즉 본질적인 가치나 초역사적 가치를 주장하기보다 개입과 균열이라는 관점을 취하는 미술을 말한다. 이는 대중문화적 재현의 매체 밖에, 혹은 그 반대 지점보다는 그 매체 안에서 작업하려는 포토몽타주 미술가들의 정치적 측면을 분명히 밝혀준다. 그것은 추상미술이 회화나 조각 매체가 갖는 고유의 가치로 돌아가려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두 그룹의 활동은 1919년경 서로 연결된다.

 

포토몽타주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로

원조 베를린 다다 그룹의 제삼자인 존 하트필드는 "아방가르드라는 명분으로" 미학화되고 있는 포토몽타주의 부조리하고 무질서적인 특징들을 비판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새로운 유형의 포토몽타주를 시도했다. 이런 새로운 형식의 포토몽타주는 정치적 좌파 진영이 신흥 노동계급이라는 관람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하트필드의 작업은 초기 베를린 포토몽타주가 종이나 캔버스로 만든 여타의 개인적인 작업처럼 전통적인 미술 작품의 지위를 갖는 특이한 오브제들의 조합에 불과하다는 점을 은근히 비판했다. 신흥 프롤레타리아의 공론장에서 작품을 창작하려는 하트필드의 시도는 포토몽타주를 인쇄 매체이자 더 나아가 대중문화적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생각하고 포토몽타주의 배포 형식을 변형하기 위한 것이었다. 

빌리 문젠베르크(Willy Münzenberg)와의 만남은 하트필드의 작업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구태의연한 화보지에 저항하는 공산당 기관지 <아르바이터 일루스트리테 차이통>(또는 <아이체>)의 디자이너로 하트필드를 고용했다.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하트필드가 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그의 작업은 대부분 <아이체>를 위한 것이었다.

 

존 하트필드 「파시즘의 얼굴 」 1928

 

그가 회흐와 하우스만으로 대표되는 베를린 다다의 포토몽타주 미학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는 1928년 공산당이 발행한 「사슬에 묶인 이탈리아」의 표지 작업인 「파시즘의 얼굴이다. 여기에는 병치, 균열, 파편화 기법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은 전혀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통일성을 만들어 냈다. 무솔리니의 머리는 안쪽에서 베어 나오는 듯한 해골 이미지와 합쳐져 있으며 작은 사진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우측에는 폭력의 희생자들과 로마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존엄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합쳐져 있으며 좌측에는 중산모를 쓴 부르주아 자본가와 무장한 파시스트 폭력배들이 합쳐져 있다. 이 합치기 기법은, 하트필드가 어떤 정치적 판단이나 진실의 전복, 혹은 뜻밖의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도 없는 무의미한 병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들에 대한 대안이었다. 

나치가 집권하기 5년 전인 1928년이라는 상황에서, 대립되는 것을 합치는 하트필드의 기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부 지식인들이 부르주아 제도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위협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대립과 저항의 전략 안에 문화 프로젝트를 위치시켜야 할 필요성을 익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집권 후에는 「히틀러 경례의 의미: 작은 남자가 큰 선물을 요구한다. 모토: 백만장자가 내 뒤에 있다!」를 통해 거대한 '살찐 고양이' 같은 인물이 건네는 돈다발을 받고 있는 소인으로 히틀러를 표현함으로써 '히틀러 경례'의 의미를 비틀고 있다. 하트필드의 발언 형식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그로테스크하면서 우스꽝스럽고, 그래서 더 기막히게 훌륭하다. 이 형식을 통해 하트필드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일어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경향의 억압에 대한 대항 세력이자 폭력적인 형식으로서 재벌이 독일 파시즘의 지도자와 결탁하게 만드는 정치와 경제의 속모를 연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존 하트필드 「히틀러 경례의 의미: 작은 남자가 큰 선물을 요구한다. 모토: 백만장자가 내 뒤에 있다!」 1932

 

기호 작용에서 커뮤니케이션 행위로

유사하게 진행되던 바이마르와 소비에트의 포토몽타주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25년경이었다. 비논리적 충격, 의미의 무의미한 파괴, 파편화를 강조해서 언어의 글자와 음성의 자기 지시적인 측면을 전면에 내세웠던 초기 전략들은 이제 프롤레타리아 공론장 창조라는 급진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조됐다. 20년대 중반까지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문화 프로젝트가 관람자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면, 이제 시각적 인지와 가독성이 탁월한 도구화된 언어와 이미지 형식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었다. 포토몽타주의 임무는 더 이상 회화와 조각, 혹은 독립적,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문화의 해체가 아니라 대중 이미지를 통해 관람자에게 교훈적 정보와 정치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는 클루치스가 1928년과 30년 사이에 만든 포토몽타주와 포스터 연작이다. 이 연작에서 들어 올린 손의 환유는 정치적 참여의 표상이자 투표하는 대중의 실제적인 재현으로 사용된다. 즉 손은 신체의 일부로, 전체를 대체해서 손을 든 주체를 명확하게 '표상한다.' 커다란 손안에 여러 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다수의 유권자를 대변하는 단 한 명의 대표자가 의사 결정의 일치단결을 '표상하는' 듯하다. 

하트필드와 클루치스는 포토몽타주를 이용해서 미술 모델의 하나로서 선동을 유발한 최초의 아방가르드 일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미술의 거의 모든 담론은 선동이라는 용어를 멀리해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더니즘의 정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선동이라는 용어에는 조종과 정치화, 그리고 주관성의 해체를 알리는 순수 도구화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그러나 하트필드와 클루치스의 작업은 여태까지 미술을 규정해 왔던 배포의 제도와 형식에 개입했다. 그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오브제의 미학을 인쇄된 잡지의 대중문화적 배포에 내재된 미학으로 변형하는 문제를 탐구했으며, 특권화 된 산업 조건을 통해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참여 대중으로 이동한 관람자의 문제를 탐구했다. 바로 그들의 목표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의 미학이 성립하게 될 현재의 구조와 역사적 틀이 형성됐다. 언제나 세력이 커져만 가는 대중문화적 선동, 즉 광고의 현재 형식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서의 선동은, 다다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가 현행의 대중문화 형식에 대해 순수와 추상으로 대립하는 부르주아의 선구적 모델이 여전히 갖고 있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 착수한 계획적인 프로젝트로 인식돼야 할 것이다.  

 

구스타프 클루치스 「위대한 프로젝트의 계획을 완수하자 Let us fulfill the plan of the great projects」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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