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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책 속 상자

[인물] 뉴욕근대미술관(MoMA)과 앨프리드 H. 바

by 책방의 먼지 2019.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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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시장이 붕괴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29년 11월 7일, 뉴욕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은 뉴욕 4번가 730번지에 있는 여섯 개의 작은 전시실에서 후기인상주의 대가(세잔, 반 고흐, 고갱)들의 전시를 개최했다. 세명의 미술 수집가, 즉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와 내무부장관의 여동생인 릴리 P. 블리스, 그리고 메리 퀸 설리번의 합작품인 MoMa는 1931년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가 세운 휘트니미술관이나 1939년 솔로몬 R. 구겐하임과 힐라 르베이 폰 에렌바이젠 남작부인이 세운 비대상 회화 미술관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문을 열었다. 부유한 미국인들의 이런 문화 기획들은 1913년의 아머리 쇼, 그리고 일찍이 모더니즘 미술을 지지한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월터 아렌스버그의 영향을 받았다. A. 콘저 굿이어(A. Conger Goodyear)가 위원회장을 맡게 된 MoMA는 "세잔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유럽 근대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 전시" 및 그런 미술을 위한 "영구적인 공공 미술관의 설립"을 목표로 했다.

미국 선진 미술에 있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국이 선진 미술을 수용하는 것은 이런 미술관들을 통해서였고, 그런 수용 자체가 이미 제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MoMA가 웰즐리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던 27세의 교수 앨프리드 H. 바 주니어(Alfred H. Barr. Kr., 1902~1981)를 관장으로 임명한 것만큼이나 근대미술을 지원하는 미술관이라는 발상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바는 1927년에 미국에서 최초로 20세기 미술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고, 그해 겨울에는 네덜란드의 데스테일, 소비에트의 구축주의, 독일의 바우하우스와 같은 유럽의 미술, 건축, 디자인 분야의 급진적인 실험들을 접했다. 아마도 바는 이런 모델들을 흡수했던 만큼이나 거부했던 듯하다. 그는 MoMA의 토대가 되는 기본 부서로 회화와 조각, 판화와 드로잉 부서는 물론 미술관 이외의 공간에서 널리 전시됐던 상업미술, 산업미술, 디자인, 영화, 사진부를 따로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바의 제안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계획을 축소했고, 바 또한 그런 의견을 상당 부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의 디스플레이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타협이 이루어졌다. 바는 외관상 미술 작품들을 다닥다닥 부착하는 전통적인 분류 방식을 폐지했지만 그렇다고 옐 리시츠키와 같은 유럽 미술가들의 실험적인 디스플레이 방식을 따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작품들을 개방된 벽과 바닥에 주제와 양식에 따라 널찍이 배치했다. 그 결과 자율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미학적 차원이 형성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작품들은 "굳이 시대 구분을 할 필요가 없이 분리됐다." 동시에 그 작품들은 "거의 완벽하게 연대기적 순서"를 따랐다. 바에게 있어 양식은 모더니즘 미술에서 주요한 의미의 매개체이며, 그 양식들의 영향 관계는 모더니즘 미술을 추동하는 제1의 요소였다. 이 지점에서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찰스 루퍼스 모리의 영향을 받았다. 바는 모리가 중세 미술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더 진화론적 모델을 20세기 미술에 적용했고, 이런 시도는 이후 수많은 미술관에서 채택됐다.

이와 같이 MoMA가 하나의 미술관 체제로서 시도한 최초의 전시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이었다. 여기서 바는 미국 대중에게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다양한 시도(회화와 조각은 물론, 사진, 구축물, 건축 모델, ㅗ스터, 영화의 스틸사진, 가구 등)을 소개했다. 한편 이 전시와 함께 출판된 학술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도표는 초현실주의, 순수주의, 신조형주의, 바우하우스, 구축주의와 같은 아방가르드의 주요 운동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면서 '비기하학적인 추상미술'과 '기하학적인 추상미술'로 귀결되는지 보여 주었다. 이것은 동시에 이 전시가 의도한 핵심이기도 했다.

1939년 무렵 53번가에 있는 신축 건물로 이전한 MoMA가 이런 운동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립함에 따라, 양식적 측면의 영향 관계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이후 미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오랫동안 묵혀 둔 작품들을 다른 미술관에 판다는 초기 계획과 달리 그냥 보존하기로 한 MoMA는 1958년에 이들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상설 전시실을 만들었다. 바는 1943년에 관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학예 연구를 담당했다. 그리고 1947년에 소장품 관리 책임자로 복직하여 1967년에 퇴임할 때까지 MoMA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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