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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8년 마르셀 뒤샹(Marchel Duchamp), 지표,「큰 유리」,「너는 나를/나에게」

by 책방의 먼지 2019.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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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샹이 마지막 회화 작품인 「너는 나를/나에게」를 완성한다. 여기서 뒤샹은 자신의 출발점이 됐던 우연의 사용, 레디메이드, '지표'로서의 사진 개념 모두를 집약한다.

 

「그녀의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 1915~23

 

 

뒤샹이 1915년부터 제작한 「그녀의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는 1923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1911~15년에 뒤샹이 남긴 노트를 보면 그가 이 작품의 개념적 윤곽을 잡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이 노트들을 「녹색 상자」(1934)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

우리는 「큰 유리」에서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유리 안에 매달린 사물들의 강력한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삼차원 환영을 주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그리고 암시적으로는 그것들을 포함하는 공간)의 윤곽을 그리는 데 사용된 강력한 일점 원근법에서 비롯된다. 둘째는 독신자들이 거주하는 기계 장치와 신부가 거주하는 금속 껍질과 무정형의 구름으로 표현된 '알레고리' 그 자체의 불가해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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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이 '노트들'을 출판하기 전까지 이 작품의 불가해한 내러티브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길지만 애매한 작품의 제목이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어떤 의미를 설명한다기보다 사실의 진술에 가깝다. '노트들'의 출판은 오히려 이 제목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다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리얼리즘'적인 외관으로 견고하게 들어앉은 사물들의 냉정한 현실이다. 이에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진실 추구와 암묵적인 해석에의 저항이라는 유리의 두 측면을 결합하는 사진적 속성이다. 왜냐하면 으레 해석을 포함하는 회화적 구성과 달리 사진은 그런 해석적 텍스트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로부터 바로 새겨진 사진이 어떠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려면 신문의 캡션과 같이 그것을 설명하는 부가 텍스트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 구조주의적으로 사진에 접근했던 프랑스 평론가이자 언어학자 롤랑 바르트는 "코드 없는 메시지"가 되는 조건이 바로 사진의 기본 특징이라고 지적하면서 사진 기호를 그림이나 지도, 단어 등 다른 유형의 기호와 대조했다. 단어는 나름의 문법 규칙과 어휘 목록으로 체계화된 언어에 근거하므로 상당히 코드화 된 기호에 속하며, 의미 형성은 바로 그 체계 내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기호로서의 단어는 그림처럼 그것의 지시 대상과 닮은꼴도 아니고, 발자국처럼 대상으로부터 직접 기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호화 의미의 관계는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다. 기호학자들은 이런 성격의 기호를 상징이라고 한다. 

한편 그림은 도상이라 불린다. 그림은 관습이 아니라 유사성을 기준으로 그 지시 대상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또한 구성되거나 조작되면서 코드화된 의미와 결합될 수 있다. 국가색이나 '최후의 만찬'임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자리 배치가 그 일례다.

그리고 마지막 기호 유형인 지표(index)는 전적으로 코드화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지표는 스스로 재조직되거나 재배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지표는 그 지시 대상에서 비롯되므로 지표와 지시 대상의 결합은 레고 블록처럼 쌍을 이룬다. 풍향에 의해 결정된 풍차의 방향, 미생물에 의해 유발된 신체의 미열, 차가운 유리잔이 탁자 위에 남긴 자국, 썰물이 모래사장에 새긴 패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코드 없는 메세지인 사진은 아무리 지시 대상과 유사하다 할지라도(혹은 그 지시 대상의 도상이 된다 할지라도) 발자국이나 신체의 증상과 같은 부류에 속하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는 구분된다. 기호학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진이 광화학적 반응을 통해 생성된 자취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진은 감광 매체에 노출된 대상의 지표이다. 

 

뒤샹의 「세 개의 표준 정지 장치」는 지표가 '코드 없는 메시지'가 될 때(이 경우에는 우연적으로 발생한 어떤 사건의 자취 혹은 침전물) 그것이 언어에 저항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단어와 같은 자신의 기호에 의존하며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동일한 채로 남기 때문이다. 비록 주어진 문맥이 단어의 함축, 심지어는 그 의미(기의)를 변경시킬지라도 그 외형인 기표는 반복과 무관하게 동일한 형태로 남는다. 어떤 맥락에서도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언제나 불변인 측정 단위(피트나 인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뒤샹의 '비표준' 자들은 모순적이게도 측정에 정확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코드화 자체를 거부한다. 

뒤샹은 「녹색 상자」에서 자신이 '소어'라고 명명한 것을 상정함으로써 언어 체계와 수 체계를 명백히 연관시킨다. "언어의 조건들:'소어(오로지 자신과 1로만 분리될 수 있는)' 찾기." 그러므로 1과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가지지 않으므로 여타의 연산 관계(다른 수들의 곱셈으로 표시되거나 다른 수들로 나눠질 수 있는)를 맺을 수 없는 소수는 "언어의 조합 기능"(몇 개의 음소들이 재결합하여 어휘라는 방대한 단어 집합을 만들거나, 혹은 이런 언어들이 결합하여 무수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법칙)에 저항하는 언어 유형과 연결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어'는 특정 사건의 표지, 즉 언어 체계 안에 거주하는 지표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이름은 그 아이에게만 속하며, 어떠한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책, '이' 사과, '이' 의자라고 말할 때 '이것'은 특정 사물만을 지칭한다.(단 내가 지시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세 개의 표준 정지 장치」 1913~14

 

지표의 파노라마

사진의 모델을 통해서 「큰 유리」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뒤샹에게 사진이라는 범주는 보다 일반적인 지표 모델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지표가 스냅사진, 연기, 지문과 같이 시각적인 것이든, '이것', '여기', '오늘'과 같이 언어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시각예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됐던 기호 유형(도상적인 것에서 지표적인 것으로)과 미술 제작 절차상에서 이뤄진 근원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지표 덕택이다. 왜냐하면 지표가 어떤 사건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큰 유리」의 '흡입 피스톤'에 새겨진 변형들처럼 우연히 발생한 사건의 침전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샹을 계기로 더욱 급진적인 것이 되고 있는 우연의 사용은 작품의 제작 과정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숙련화시킨다.(여기서 미술가는 카메라처럼 탈인격화 된다. 작품 제작에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카메라조차도.)

뒤샹은 「녹색 상자」에서 우연, 사진, 텅 빈 언어 기호 모두를 결합한다. 그는 이런 우연적인 만남을 스냅사진(사건의 지표적 기록)과 비교하면서 그것은 "그 사건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바로 그 시간에, 그렇게 말하는 연설과 같은 것"이라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부적절하게도 기계화된 언어적 사건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이다. 

뒤샹은 지표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끌어내고 그것들을 결합한다. 이런 종합의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그가 드라이어를 위해 제작한 마지막 회화 작품 「너는 나를/나에게」다. 왜냐하면 입체주의 이후 뒤샹의 작업 경향을 집약하고 있는 이 작품은 무수한 외관을 지닌 지표의 파노라마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뒤샹이 사물과 조우한 순간의 지표 혹은 흔적인 「자전거 바퀴」(1913)나 「모자걸이」(1916)와 같은 레디메이드는 여기서 또 다른 지표 형식인 그림자 형태로 캔버스 위에 드리워진다. 

「너는 나를/나에게」에서 문제는 뒤샹이 대화의 양편인 '너'와 '나'를 동시에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뒤샹은 언어적 관례를 교란시키고자 '너'와 '나'의 역할을 모두 떠맡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너는 나를/나에게_________?" 이것은 신부가 위치한 '마르(MAR:불어로 '결혼한'의 축약형)'라는 이름의 상부 영역과 남성 독신자들이 위치한 '샐(CEL:불어로 '독신자'의 축약형)'이라는 이름의 하부 영역으로 이루어진 「큰 유리」를 위한 작은 스케치와 관련된다. 물론 '마르'와 '셀'을 조합한 '마르셀'은 뒤샹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자신은 「너는 나를/나에게」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이하게 분열되고 중복된 자아로 제시된다.

 

자연주의에서 입체주의나 야수주의와 같은 모더니즘 미술로의 이행을 통해서 도상적 재현 양식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고,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일점 원근법 체계는 위기를 맞았으나 이미지를 마주한 주체 혹은 관람자의 통일성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원근법에서 관람자는 특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회화적 공간을 통일시킬 다른 수단을 발견한 입체주의와 야수주의조차 작품의 관람자이자 해석자인 통일된 인간 주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도상 기호에서 지표 기호로 자신의 작업 영역을 변경한 뒤샹의 시도가 갖는 진정한 함의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연동소로서 지표는 '그리기' 혹은 '기술'과 단절하는 동시에 의미를 반복 가능한 약호로부터 유일한 사건으로 전치시키고 그것을 넘어서 '나'라고 말하는 사람(여기서는 뒤샹 자신), 즉 주체의 지위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뒤샹의 거대한 자화상 「너는 나를/나에게」에서 그는 대명사 영역의 양극에 의해 찢겨진, 분열적이고 이접적인 주체로 자신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후 무수한 사진 자화상에서 그가 여장하거나 '로즈 셀라비'라고 서명할 때조차도 그는 젠더의 양극으로 분열된 자아로 등장한다. 이렇게 뒤샹의 주체 분열은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를 잇는 가장 급진적인 행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는 나를/나에게 Tu m'」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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