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9년 피카소의 혼성모방

by 책방의 먼지 2019. 9. 22.
반응형

▲ 파블로 피카소가 13년 만에 파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의 작업에서 혼성모방이 시작된 시기는 반모더니스트적인 회귀 운동이 널리 퍼져나간 시기와 일치한다.

 

프랑스 아방가르드 미술의 컬렉터이자 화상인 독일인 빌헬름 우데(Wilhelm Uhde)는 1919년 피카소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01년 우데 자신의 초상화가 대표하는 분석적 입체주의부터 콜라주, 그리고 종합적 입체주의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피카소가 전개시켰던 강력한 양식들 대신 낯선 혼성 작품들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의 유산, 다시 말해서 입체주의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이미 전쟁 전에 시작됐다. 몬드리안, 들로네, 프란티셰크 쿠프카, 말레비치 등의 미술가들은 이 유산이 1911~12년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나타난 환원된 그리드 이후에 오는 논리적 변화, 즉 순수 추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 마르셀 뒤샹이나 프랑시스 피카비아처럼 입체주의 콜라주를 레디메이드로 확장시키고 예술의 기계화로 가는 물꼬를 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논리에 따라 입체주의를 전개시킨 피카비아의 자칭 '기계 형상'은 근대 산업이 낳은 플러그, 터빈 부품, 혹은 카메라 같은 것들을 기계적 드로잉을 통해서 차갑게 묘사하고는 이것을 초상화라고 선언했다. (앨프리드 스키글리츠의 초상, 비평가 마리우스 데 자야스의 초상, 「발가벗은 어린 미국 소녀의 초상」등등) 흥미롭게도 이 작품들은 대부분 1915년에 제작됐고 피카소가 분명 보았을 법한 잡지 <291>에 실렸다.

피카소가 이 두 가지 방향이 입체주의 이후에 전개될 논리적 단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창작이 나아갈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같다. 피카소는 추상에 집요하게 반대했으며 (종종 사진에서 드러나는) 관점의 기계화, 혹은 (레디메이드에서 드러나는) 제작의 기계화도 반대했다.

1915년 여름 입체주의 자체의 논리적 상과 중 하나인 피카비아의 차갑고 비개성적인 레디메이드 기계 형상 초상화를 접한 피카소는 이에 대한 거부감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승화시킨 인물화라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미지를 연속해서 제작했는데, 각각의 포즈, 조명, 세부 처리, 규모, 특히 선묘 표현 등이 놀랍도록 유사했다. 이 작업은 이상하리만큼 변화가 없고 둔탁해 보이는 것이 마치 직접 보고 그린 것이라기보다 배껴 그린 것 같았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피카소의 신고전주의는 피카비아가 '기계 형상'에 사용한 바로 그 어휘, 기계적으로 차갑고 비인간적인 레디메이드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된 사물을 능가하려는 전략으로서 고전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산업 생산된 사물에 대해 레디메이드는 찬사를 바쳤으며 추상화와 추상 조각은 연작 제작이라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 오브제와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피카소가 전개한 고전주의 전략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서 고전주의는 피카소가 경멸했던 바로 그 태도, 말하자면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입체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는 그 태도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혼성모방' 경우에는 다른 모델을 제안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당시 막 전개되고 있던 정신분석 이론에서 프로이트가 강조한 '반동형성(reaction-formation)' 모델로, 억압된 충동이 기이하게 변형되는 것을 말한다. 반동형성은 저속한 리비도에 자극을 받은 충동들을 그 반대가 되는 '고귀하고', 훌륭하고, 올바르고, 적절한 행동으로 대체해서 그 충동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즉 정제되고 숭고화된 가면 아래에 충동을 은닉함으로써 금지된 행동을 지속하려는 기제이다. 항문기의 자아는 '불결함'에 대해 지닌 터질 듯한 충동을 강박적 자제심, 혹은 양심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쪽으로 변형시킨다. 유아기에 자위행위를 경험한 이들은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데, 만지고 문지르는 성적 욕망들을 '손을 씻는다는' 허용된 형태로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 프로이트는 반동형성에서 '이차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주체는 은근슬쩍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변형된 행동은 사회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된다.

피카소의 혼성모방을 설명하기 위해 '반동형성' 모델을 사용하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반동형성은 입체주의와 신고전주의적 '타자' 사이에 변증법적 연결, 다시 말해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도 공존하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둘째, 이 모델은 '질서로의 복귀' 현상을 비롯해 조르조 데 키리코부터 후기 피카비아를 아우르는 회고적 회화까지 20세기에 등장한 많은 다른 유형의 반모더니즘 작업들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반동형성 모델은 반모더니즘 작품들이 거부하고 억누르고자 했던 모더니즘적 작업의 바로 그 특징들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단계를 보여 준다.

 

이런 경우로는 데 키리코와 피카비아, 그리고 형이상학 회화 말고도 1907년 파리로 이주한 후 피카소를 만나 곧 입체주의에 몰두하게 된 스페인 친구 후안 그리스가 있다. 「피카소의 초상」(1912)에서 그리스는 윤곽을 없애고 양감을 파편화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현실감 있게 그려진 재현물에 기하학적 그리드를 그려 넣는 새로운 양식을 구사했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호했던 정통적 그리드 대신 입체주의가 폐기했던 원근법을 연상시키는 입체주의 고유의 점묘면을 보여 주는데, 그리스가 그렇듯 분석적 입체주의에서도 색채는 양감과 명암 표현을 위한 차분한 색조로 국한돼 쓰였다. 그러나 이 점묘 화면은 곧 금속 느낌을 주는 에나멜을 칠한 표면으로 바뀐다. 그리스의 양식에서 보이는 단단한 표면은 피카비아의 기계 형상 즉, 기계 부품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그리스는 점차 산업적으로 제작된 미학적 표면에 이끌렸는데, 나뭇결 같은 재질과 반사된 빛은 「신문과 과일 접시」에 이르면 상업적 일러스트레이션의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언어로 변형된다. 그리스 자신은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입체주의 해석가인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도 이런 단단하고 냉담한 방식을 고전주의 형태로 생각했다.

 


▶관련글: [사건] 질서로의 복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