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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7년 몬드리안

by 책방의 먼지 2019.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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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트 몬드리안이 2년 동안의 집중적인 연구 끝에 추상을 향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곧이어 최초의 아방가르드 잡지 <데 스테일>이 출간되어 미술과 건축의 추상 운동에 이바지한다.

 

1914년 7월 가족을 방문하러 네덜란드를 찾은 몬드리안은 때마침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5년 동안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1912년 초 파리로 처음 떠났을 때 하나의 목표는 입체주의에 정통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혁신적으로 콜라주를 도입한 이 운동이 최근 방향을 수정했으며 재현 기호로서의 위상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아 1910년 여름으로 돌아갔다. 입체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해였던 1910년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자신들이 완벽하게 추상적인 그리드를 그리기 직전까지 갔음을 깨닫고 뒷걸음질 친 해였다. 그들은 회화에 지시성을 지닌 파편들을 다시 삽입했고(예를 들면 피카소의 「다니엘-핸리 칸바일러의 초상」에서 넥타이와 수염 같은 것) 곧이어 문자를 회화면에 편평하게 집어넣었다. 이 회화면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대조되면서 삼차원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적어도 회화의 재현적 특징을 암시해 줄 수 있었다. 

몬드리안은 이 분석적 입체주의를 신지학(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결합한 초자연적이면서 혼합적인 사조였으며 20세기 초에 성행했다.)과 혼합된 세기말적 상징주의의 관점으로 해석했고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가장 두려워했던 추상과 평면성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추상과 평면성은 그의 신념 체계의 핵심인 '보편성'의 범주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은 정면 시점을 적용해서 그가 즐겨 쓰는 모티프를 입체주의의 그리드보다 더 엄밀한 직각 형태로 변형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이 방법을 통해 그가 이미지의 특수성이라고 불렸던 것이 극복되고 공간의 환영은 '진리', 즉 모든 사물의 '영구불변의' 본질인 수직과 수평의 대립으로 대체된다. 당시 몬드리안은 이 방식에 절대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회화의 기능은 세계의 기저에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되며 이향대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대립항들이 어떻게 서로를 중립화시켜서 영원한 평정 상태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흑백 구성 10번(방파제와 바다)」 1915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돔뷔르흐의 미술가 공동체에서 옛 신지학 동료들과 어울리며 작업한 몬드리안은 전에 다양한 후기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렸던 작은 고딕 성당, 바다, 방파제 같은 모티프에 자신의 디지털화 기법을 적용하려고 했다. 그 결과 단 두 점의 회화 작품, 「방파제와 바다」란 별칭을 가진 1915년의 「흑백 구성 10번」과 「구성 1916」만을 제작했는데 두 점 모두에서 현저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변화의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몬드리안이 헤겔의 철학을 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헤겔을 통해 디지털화에 내재된 정적인 특징과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적 진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 뒤에 존재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났다. 왜냐하면 헤겔의 변증법은 대립항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립항들의 중립화를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변증법은 긴장과 모순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 체계이다. 당시 몬드리안이 정한 일생의 모토 "각각의 요소는 그 반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헤겔의 철학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가시적 세계를 기하학적 패턴으로 번안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번안보다는 현실 세계를 코드 형식으로 바꾸는 자의적 기호들을 정립하는 것이므로 '코드- 변환'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흑백 구성 10번」과 「구성 1916」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십자형 자체보다는 그 형태의 형성과 분해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구성 1916」을 완성하자마자 몬드리안은 이 작품이 수직성만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스스로 비판하긴 했지만 교회의 정면에 나타난 모든 지시물들은 이 작품에서 삭제됐다. 즉 이 작품은 더 이상 코드 변환된 세계의 볼거리가 아니라 디지털화된 회화 미술의 요소 그 자체, 각각의 기본 암호로 환원된 선, 색, 면이다. 비록 몬드리안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정신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미술은 이제 회화의 물질성 그 자체에 대한 가장 엄밀한 연구 중 하나가 됐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 이상주의로부터 극단적 유물론으로 변증법적으로 도약하는 것은 초기 추상미술 선구자들의 진화 과정에 자주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몬드리안의 환원 원칙은 최대 긴장의 원칙이다. 즉 직선은 단지 '긴장한' 곡선일 뿐이다. 이런 논리는 면에 적용된 후에 색채에 적용됐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920년에 삼원색을 채택했는데, 이것은 몬드리안의 논리에서 필연적인 결과였다. 우선 그는 색채는 빛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질료라는 괴테의 색채 개념을 머리에서 지웠다. 1916년 중반 「선 구성」을 시작했을 때 몬드리안은 이미 순수 추상에 돌입했다. 

그의 작업은 지시의 의무에서 해방되자 급속도로 진전됐다. 1917년 초에 완성된 「선 구성」은 앞선 두 작품에 나타난 역동성을 극대화하고 본래의 임의성과 의도적인 비위계적 질서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이 작품을 통해 회화 언어의 주요 요소가 여전히 그의 작업에서 다소 소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형상 그 자체는 전적으로 그리드에 의해 분산되고 그리드 안으로 흡수되어 완전히 가루처럼 흩어져서 가상으로 존재하지만 검정 혹은 진회색 선 뒤의 흰 배경은 아직 완전히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경은 흩어져 있는 회화 요소들을 가상으로 서로 연결시켜 주는 기하학적 관계들에 의해 광학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형상으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빈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당시에 몬드리안은 배경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만둘 때만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형상과 배경 사이의 대립, 즉 재현의 조건은 순수 추상의 미학적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없어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몬드리안은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선 구성 」 1917

 

몬드리안은 「선 구성」을 완성한 직후에 시작한 연작에서 중첩된 평면들을 모두 없앴다. 배경으로 존재하는 배경을 없애는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돼 마지막에는 모듈화된 그리드 단계로 나아간다. 몬드리안은 이 그리드를 1918~19년에 제작된 아홉 점의 회화에서 연구했다. 그는 캔버스 비율을 바탕으로 캔버스를 규칙적인 단위로 분할했고, 표면 위로 선험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억제하는 연역적 구조를 수용했다. 배경과 배경이 아닌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즉 배경은 형상이고 화면은 이미지다.) 캔버스 표면 전체는 다시 그리드가 됐지만 그리드는 더 이상 빈 공간에 놓인 입체주의의 작업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캔버스의 전 구역은 동일한 크기의 직사각형 단위로 분할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단위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다이아몬드' 회화라고 불리는 최초 네 점의 작품을 포함한 이 모듈 캔버스 연작에서 어떤 단위들은 더 두꺼운 윤곽선이나 색채로 강조하고 어떤 단위는 강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대조시키는 작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몬드리안의 헤겔주의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즉 역동적 긴장은 작업의 핵심이어야 하지만 그리드는 자동적으로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다.(그 이유를 정확히 말하면 규칙적인 그리드의 전면적인 연속성은 애드 라인하르트와 그를 추종하는 다수의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유독 좋아했던 긴장의 파토스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두운 색의 장기판」과 「밝은 색채의 장기판」이라는 어이없는 이름의, 구성이 거의 없는 작품에는 작동 모듈의 '객관적' 데이터와 색채 분포의 '주관적' 작동이 서로 충돌한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보편성'이 발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분간 '특수성'은 사라져야만 한다.

두 장기판 회화가 그런 유형의 작품 중 마지막에 해당된다. 그는 이 작품을 1919년 봄에 완성하자마자 파리로 돌아갔다. 이때 그는 입체주의에서 비롯된 회화의 여러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모듈 그리드 작업에서 발견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파리는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작품 전시회가 개최되는 등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몬드리안은 모듈 그리드가 자신의 이론과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그리드의 기본은 반복이며(몬드리안에게 기계의 반복적 리듬과 계절의 반복적 리듬은 다르지 않다.) 망 조직(정사각형들의 연결 망으로 분할)은 환영적 광학 효과(모든 환영은 자연이 만든 것이다.)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을 금지한 그의 이론에 대한 이중 부정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리드 구성 9 (밝은 색채의 장기판)」 1919

 

신조형주의의 창안

1920년 말에 이르자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라고 이름 붙인 원숙기 양식이 자리를 잡았다. 신조형주의는 몬드리안이 모듈 방식을 점차 지워 나가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한 후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가 선정한 이 난해한 목표는 또다시 위계의 측면에서 형상과 배경을 대립시키지 않으면서 구성을 재도입하는 일이었다. 이 새로운 평정 상태는 모든 단위들의 균등화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그 단위들의 불협화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색면은 나란히 인접하지 않고 대부분 회화의 경계로 자리를 옮겼다. 형상과 배경의 대립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듈 그리드 내에서도 대립이 없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각각의 단위들은 다른 단위들이 중심이 되려는 성향을 붕괴시킨다. 

최초의 신조형주의 회화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은 이 새로운 방식의 효율성을 증명한다. 이제 신조형주의 회화는 소우주의 모델, 즉 변증법적 사고의 파괴력을 새로 검증할 때마다 사용되는 이론적 대상이 될 것이다. 몬드리안은 이 표현 형식을 단번에 정한 후 뉴욕에서 말년을 보낼 때까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는 20년 동안 이 형식을 사용해서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하는 형태의 정체성 개념과 투쟁했다. 그는 형상과 배경에 뒤이어 면과 선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다시 말해 이런 회화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세속적 기능을 차례로 문제 삼았다. 

1917년 10월 판 뒤스뷔르흐가 <데 스테일>을 창간하는 동시에 젊은 동료들은 몬드리안을 지지하고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 데 스테일 그룹의 프로그램은 대체로 모더니즘적이었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처럼 데 스테일은 자신들의 창작을 과거 미술의 논리적 정점으로 생각했고, 이처럼 '필연적인' 진화의 원동력은 각기 다른 예술들이 그 예술 고유의 '본질'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연구하고 불필요한 규범을 없애는 것이라고 보았다. 데 스테일에서 회화와 건축의 관계는 모두 평면 단위를 사용했기에 융합이 가능했지만 화가와 건축가의 협업이 너무나 어렵다는 결론이 나자 그들은 진보적인 해체의 길을 걸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이론적인 부분이었다. 몬드리안 미학의 핵심은 위계와 중앙 집중성 그리고 '특수성'을 폐지하는 것인데 그가 보기에 건축은 본질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예술이었다.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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