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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6년a 다다, 한스 아르프, 클레

by 책방의 먼지 2019.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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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래주의와 표현주의의 도발에 대한 이중 반작용으로 취리히에서 국제적인 운동 '다다'가 시작된다. 

 

모든 예술 규범에 대한 무정부적 공격이라는 다다의 계획은 급속히 타올랐다. 다다는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20년대 초반에 대부분 사그라졌거나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독일 신즉물주의에 편입됐다.) 적어도 여섯 개의 주요 활동 기지가 있었다. 취리히, 뉴욕, 파리, 베를린, 쾰른, 하노버가 있었고 그중 몇몇 지역들은 다양한 저널과 방랑하는 예술가들, 트리스탕 차라와 프랑시스 피카비아 같은 야심 찬 기획자들을 통해 간헐적으로 교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파국과 미래주의와 표현주의의 도발에 대한 이중 반작용으로 시작된 다다는 부르주아 문화를 직접 겨냥하여 전쟁의 학살이 부르주아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부르주아 문화는 이미 죽은 것이었고 다다는 그 무덤 위에서 춤을 췄다.(취리히 그룹의 주요 인물인 후고 발은 다다를 가장 불온한 유형의 '위령 미사'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해 다다는 모든 기준, 심지어 초기에 설정한 그들 고유의 기준조차도 공격할 것을 맹세했고 취리히 다다는 기이한 퍼포먼스, 전시, 출판물을 통해 이를 실천했다.

 

아방가르드 장치들의 병치

취리히 다다의 두 번째 단계에서 주요한 인물은 한스 아르프였다. 다다에 참여하기 전에 파리 아방가르드 진영에서 활동했던 아르프는 입체주의 콜라주를 다다식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여기서 콜라주는 기호학적 분석의 매체라기보다 우연적인 구성의 매체가 됐다. 아르프는 여러 가지 색의 상업용 종이를 임의의 크기로 찢어서 바닥에 떨어뜨린 후 떨어진 자리에 풀로 붙이는 유형의 콜라주 여러 점을 제작했다. 그는 우연을 실험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에 대해 발은 "회화의 신들(표현주의자들)의 허세에 저항하는"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표현적 미술가의 권위에 대항하는 작업이라는 뜻이었다. 아르프는 자신의 콜라주를 "인간의 자만에 대한 부정"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최근에 등장한 아방가르드적 장치들이 병치된 훨씬 탁월한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콜라주와 우연이 함께 작동할 뿐 아니라 레디메이드(상업용 종이)와 추상적 그리드도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장치들은 아르프에게 미술가의 '의지'를 몰아내고 '익명성'이라는 조건으로 향하게 하는 데 사용됐다. 

 

세밀화의 숭고

1914년 초 막케와 함께했던 튀니지 여행은 클레에게는 중요한 여행이었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빛과 이국적 색채의 감각적 즉시성에 흠뻑 빠져 이 세계에서 받은 감동을 들로네의 '창'에서 일부 나타나는 강렬한 그리드 패턴으로 표현했다. 그때 그는 바로 그 현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이따금씩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산이 부서진 세계 속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요즘처럼) 이 세계가 무서워지면 무서워질수록 미술은 더 추상적이 되어 간다."

추상으로 향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은 모더니즘 미술이 현실에서 멀어진다기보다 현실이 모더니즘 미술로부터, 다시 말해 기술과 전쟁으로 인해 변형된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 미술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클레가 「한때 회색빛 밤에서 나타났다」에서 문자화 된 기호로 전환한 것은 이런 입장의 진상을 보여 준다. 그가 "추상의 냉정한 낭만주의"라고 불렀던 것은 근본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것(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숭고'라고 불렀던 것)을 재현할 필요가 있음에 대한 이해를 나타낸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무한의 암시에 내포된 짓누르는 공포와 숭고한 해방의 조합을 묘사하기 위해 숭고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점에 있어 숭고는 재현이 완벽하게 불가능한 두 가지 형태, 다시 말해 현대 전쟁의 결과인 수백만 명의 사상자들과 무의식의 채울 수 없는 욕구를 통해 20세기로 진입했다. 

클레의 자필이 있는 회화는 이런 조건 중 첫 번째를 세밀화에 나타나는 숭고의 형태로 다뤘다. 언어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 사이의 언어학적  경계선 사이에 있었던 독일 표현주의 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Christian Morgenstern, 1871~1914)과 달리 클레는 시각적 묘사가 언어적 명명을 능가하는(기욤 아폴리네르가 이 형식을 실천에 옮겼다.) 칼리그람의 수용을 거부했다. 모르겐슈테른의 「물고기들의 세레나데」에서 시적 운율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들(강세가 없는 음절들의 강약운율을 나타내는 작은 곡선들)은 타원형을 형성하고 표시된 대시는 비늘이 붙은 물고기, 혹은 수조의 물결치는 표면으로 변형된다. 클레는 무한을 떠올리게 하는 카오스로부터 발생해서 명료해지는 것에 관해 모호하게 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 그 말의 끔찍한 내용을 직접 묘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클레도 그의 신조를 옮긴 묘비명에서 이 프로그램의 간접성을 내비쳤다. "미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게 만든다." 이런 개념적 접근은 "숫자와 문자처럼 추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빌라 R」과 「로자 실버의 목소리 천」같은 회화에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숫자와 문자처럼 추상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 있는 한 선의 움직임이 관람자에게 전달되고 이미지는 공간에서보다는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는 클레의 믿음으로 확장된다. 이런 서사화는 클레가 "산책하는 선"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시각적으로 포착되며 대부분 그의 그림 가장자리에 적혀 있던 암시적인 설명과 제목에서 언어적으로 포착되므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클레의 「새로운 천사」의 첫 전시에서 이 작품을 구입했다. 벤야민은 죽기 직전에 완성한 마지막 글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 그 그림을 자본주의 기술이 과시하는 '진보'의 파괴적 효과에 관한 비유의 기본으로서, 클레의 「한때 회색빛 밤에서 나타났다」와 조화를 이루는 비유로서 사용했다.  

 

"한 천사가 그려진 「새로운 천사」라는 클레의 회화가 있다. 그 천사는 자신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눈은 노려보고 있지만 입은 벌어져 있고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이런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한다.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잔해를 쌓아 가고 그의 발 앞에 그 잔해를 내동댕이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보고 있다. 천사는 거기에 머물면서 죽은 자를 깨우고, 부서진 것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낙원에서 불어 온 폭풍이 날개에 거칠게 부딪혀 그는 더 이상 날개를 접을 수 없다. 폭풍은 그가 등 돌린 미래로 그를 떠밀어 보내고 그의 앞에 놓인 잔해 더미는 하늘 높이 올라간다. 우리는 이 폭풍을 진보라고 부른다." 

 

파울 클레 「한때 회색빛 밤에서 나타났다 Einst dem Grau der Nacht enttaucht......」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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