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셀 뒤샹은 입체주의와의 단절로서 레디메이드를 제안하며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미술 매체를 비판한다.
1912~14년은 아방가르드에 있어 중대한 시기였다. 추상이나 콜라주 같은 새로운 회화 제작 방식이 나타나 재현적인 회화와 단절을 꾀하고 구축이나 레디메이드와 같은 새로운 오브제 제작 방식은 구상적인 조각에 도전함으로써 인체에 대한 오래된 관심을 산업 재료와 상품에 대한 새로운 탐색으로 대체했다. 이런 전개 양상은 모더니즘 미술에 내재한 것이었지만 당시 진행됐던 미술 외적인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타틀린이 만든 최초의 구축물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그리고 마르셀 뒤샹이 만든 최초의 레디메이드는 20년대 상품 문화를 시기적으로 앞서 실현했다.
예술가가 없는 예술 작품
마르셀 뒤샹은 개인적인 에로티시즘이 가미된 '누드'와 '처녀'와 '신부'를 주로 다루던 입체주의 회화에서 주관성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사물들을 제시하는 레디메이드로의 이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설명할 만한 단서는 그리 많지 않다. 1911년 만난 재력가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를 통해 댄디적인 '반항자'로서의 예술가 개념을 알게 됐고 이를 채택해 발전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해 레몽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의 소설 「아프리카의 인상」(1910)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관람하고 루셀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낸 기이한 방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루셀은 어구를 골라서 그것의 동음이의어를 만들고 그 어구 중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 후 나머지 어구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두 어구를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내러티브를 조합해 낸 것이다. 여기서 글쓰기는 기능 장애를 가진 기계가 된다. 뒤샹은 "루셀이 나에게 길을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동음이의어적 언어유희와 "회전 부조(rotorelief)"에서 발견되는 기능 장애적인 기계 개념, 그리고 우연과 선택, 임의적인 것과 주어진 것을 결합하는 그의 전반적인 전략은 모두 루셀의 영향이다. 자동 드로잉과 레디메이드 오브제와 같은 전략들은 전통적인 예술과 예술가 개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뒤샹이 한때 언급했듯이 작품은 "예술가가 없는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 일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1년 뒤샹은 '폭발한' 커피 분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이어그램적인 측면을 통해 전통적인 회화적 회화(pictorial painting)와 연루된 모든 것들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1912년 <공중 이동수단>전에서 만난 조각가 브랑쿠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화는 끝났다. 누가 감히 이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이 언급이 기계 미술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도 뒤샹을 사로잡은 기계는 좌절된 욕망의 기능 장애적인 형상이었다.(흔히 「큰 유리」로 알려진 뒤샤의 1915~23년 작품 「그녀의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에 거주하는 형상들처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뒤샹의 작품은 이런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실용적인 사물과 미학적 대상, 그리고 상품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나의 그림이 프로펠러만큼이나 익명적이고 비주관적이며 '완벽할' 수 있을까? 이런 견지에서 뒤샹은 제작되지 d않은 주어진 사물이나 창작되지 않은 주어진 (전혀 망막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선호했다. 그 예로 1913년과 14년에 제작된 「초콜릿 분쇄기」 두 점을 들 수 있다. 투사된 이미지를 다이어그램화한 이 작품에서 다색 질료로 이루어진 분쇄기들은 은밀하게 성과 배설물을 암시하며 회화를 패러디하고 그것을 산업 다이어그램의 지위로 강등시킨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뒤샹은 작가의 개념을 흩트리기 위해 우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선택된 사물을 예술의 위치에 놓은 레디메이드였다. 이런 방법은 기술, 매체, 취향에 대한 오래된 미학적 질 문들을(좋은 그림이냐 나쁜 그림이냐?) 존재론적이고(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식론적이며(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제도적인 질문으로(누가 예술을 결정하는가?) 탈바꿈시켰다. 여기서 그가 남긴 두 개의 노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1913년에 쓰인 노트에서 뒤샹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예술 '작품'이 아닌 작업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모호한 단상으로 이루어진 1914년의 기록에는 "일종의 회화적 유명론(Nominalism)"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노트에서 뒤샹이 예술을 명명하는 일(주어진 이미지나 사물을 예술로 임명하는 일)을 예술을 제작하는 일과 동일시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레디메이드'는 의자 위에 거꾸로 놓인 자전거 바퀴였다. 우리는 이 바퀴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예술로 아니면 '작업물'로? 혹은 자유롭게 회전하는 이 바퀴는 그저 인공물이자 실용품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작품 「병걸이」는 이런 사용의 문제에 더욱 천착한다. 병을 건조하는 이 도구가 아무리 추상 조각의 외관을 띤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실용적인 사물과 평범한 상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결국 관람자는 미적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샘」은 다른 레디메이드에서 제기됐던 일련의 질문을 더욱 도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뒤샹은 뉴욕의 설비업체인 J.L. 머트 사의 전시장에서 선택한 변기를 90도로 회전하여 좌대에 세우고 'R. 머트'라고 서명한 뒤 미국독립미술가협회에 제출했다.(리처드의 'R'은 속어로 부자를 의미하며 '머트'는 머트 사와 당대 유명한 마노하 캐릭터였던 머트 모두를 지칭한다.)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가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뒤샹이 심사위원장이었지만, 협회는 심사 없이 익명의 R. 머트가 제작한 「샘」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전시했다. 뒤샹은 대리인 비어트리스 우드를 통해 그 작품이 거절당한 이유에 반박했다. 잠시 동안 발행됐던 잡지 <블라인드 맨> 5월호에 개제된 '리처드 머트 사건'에 대한 그의 변호문은 다음과 같다.
6달러를 내면 누구든지 전시할 수 있다
리처드 머트 씨는 「샘」을 제출했다. 어떠한 논의도 거치지 않고 이 물건은 사라졌고, 전시되지도 않았다.
머트 씨의 「샘」이 거절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저속하다고 주장했다.
2. 그것은 표절이며, 평범한 배관 설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욕조가 비도덕적이지 않은 것처럼 머트 씨의 「샘」 또한 비도덕적이지 않으므로 이런 주장은 부조리하다. 그것은 배관 설비를 파는 가게의 진열대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잇는 하나의 설비에 지나지 않는다.
머트 씨가 직접 그 「샘」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용품을 고른 후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유용성이 사라지도록 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창조해 냈다.
그 작품이 배관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것 또한 부조리하다. 미국이 낳은 예술 작품은 배관 시설과 다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비도덕성과 유용성, 그리고 독창성과 의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따. '우연'과 관련된 질문들, 즉 미술가라는 권위에 의해 미술이 선택되는가에 대한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레디메이드가 예술인 것은 뒤샹이 그렇게 선언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후 뒤샹의 주장처럼 레디메이드는 "시각적으로 무관심한 반응과 좋고 나쁨이라는 취향의 전적인 부재, 그리고 완벽한 무감각에 근거하여" 그런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가? 최초의 상태 그대로 전시되지 못한 「샘」은 시간상 바로 그 시점에 멈춰 버렸고, 질문들은 지연됐다. 이렇게 이 작품은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오브제 중 하나가 됐다.
계몽주의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부르주아 미학 전통에서 예술은 실용적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자율성과 "무목적적인 목적성"(칸트), 정확하게는 그것의 무용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에서 예술을 사용하는 시도는 허무주의적이다. 뒤샹은 1913년 어느 노트에서 "램브란트의 작품을 다리미판으로 사용하기"라고 제안함으로써 이런 관점을 극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레디메이드는 부르주아의 급진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한때 언급했듯이 "당장의 사용가치를 환기함으로써 위대한 예술 작품의 물화를 취소하려는 행위는 상당히 무정부주의적이다." 이 지점에서 뒤샹과 타틀린의 예술 제도, 즉 그들이 작업하는 문맥에 대한 비판은 상이한 양상을 띤다. 부르주아들의 도시인 파리와 뉴욕에서 작업했던 뒤샹은 자율적인 에술제도를 댄디적으로 때로는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혁명이 진행된 러시아에서 타틀린은 잠시 동안이었지만 제도의 변혁을 희망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댄디였던 샤를 보들레르와 정치 참여적이었던 귀스타브 쿠르베와 마찬가지로 뒤샹과 타틀린은 상보적인 두 개의 예술가 모델을 제안하고 잇다. 하나는 상품 문화의 지평내에서 예술의 이름을 다시 붙이려는 모호한 소비자로서의 예술가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혁명의 지평 내에서 예술과 산업 생산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적극적인 생산자로서의 예술가 모델이다. 이후 미술가들이 자신의 역사적 한계 내에서 이런 가능성으로부터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는 20세기 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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