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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2년 입체주의 콜라주, 피카소, 시각과 언어, 기욤 아폴리네르, 말라르메

by 책방의 먼지 201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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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징주의 시, 대중문화의 부흥, 그리고 발칸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의 저항 등, 서로 충돌하는 여러 상황과 사건들이 영감을 주는 가운데 입체주의 콜라주가 창안된다.

 

끊임없이 '새로움의 충격'을 보여 준 모더니즘은, 시에서는 1912년 여름 기욤 아폴리네르가 출간을 앞두고 있던 시집의 제목을 갑작스레 바꾸면서 표출됐다. 그는 '생명수/브랜드'라는 상징주의적인 제목을 좀 더 통속적이고 시류에 맞는 「알코올」로 바꾸고 서둘러 시집에 추가할 새로운 작품을 썼다. 이때 추가된 「지대」라는 시는 광고판이나 거리 표지에 나타난 언어유희를 찬양함으로써 모더니티가 아폴리네르에게 준 충격을 드러냈다. 

그가 보낸 신호는 상징주의(특히 말라르메)가 신문 저널리즘과 시 사이에 세우고자 했던 바리케이드가 무너져 버렸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지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분명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광고 전단, 카탈로그, 포스터"는 "아침의 시다. 그리고 산문으로는 신문이 있다...... 경찰 보도가 실린 선정적인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신문은 입체주의에서도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피카소는 1912년 가을에 분석적 입체주의 회화에 해당하는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에서 기계 인쇄한 유포 조각을 붙이는 작업에 착수한 터였다. 그러나 회화의 개념에는 변함이 없고 그저 단순히 이물질을 붙이는 방식은 일찍이 브라크가 도입하고 피카소가 채택한 입체주의의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입체주의는 비교적 커다란 종이들을 입체주의 드로잉의 표면 위에 통합했다.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라는 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면서 입체주의의 전체적인 표현 방식은 갑자기 변했다. 때로는 단편화된 부분의 귀퉁이에 붙어 있고 때로는 자유롭게 부유하거나 그림 표면의 격자 부분에 몰리기도 했던 기울어진 작은 면들은 파편화된 양감을 지녔던 형태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 벽지, 신문, 병 라벨, 악보, 심지어 예전에 그렸던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종이들이 들어섰다. 책상이나 작업용 탁자를 덮은 종이들은 서로 겹쳐지면서 화면의 정면성과 보조를 맞춘다. 게다가 화면의 깊이는 맨 위에 붙은 종이와 그 아래 붙은 종이 사이의 거리, 즉 종이 한 장만큼 밖에 안된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파피에 콜레의 효과는 이처럼 단순한 즉물주의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배경 종이가 정물화의 탁자나 와인 병, 혹은 악기보다 앞에 있는 대상의 표면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각적인 '형상-배경 역전'의 효과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주요 특색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콜라주는 분석적 입체주의를 능가하여, 기호학 용어로 쓰자면 '도상적인'것 자체의 파괴를 선언했다. 

이미지를 묘사하는 사물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시각적 재현의 영역은 언제나 '도상적인' 기호로 추정됐다. '닮음', 즉 유사성의 문제는 여러 단계의 양식화를 거치고도 고스란히 일관된 재현 체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기호학자들은 도상적인 기호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을 '상징적인'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 영역은 완전히 자의적인 기호들이다. 그 예로 언어를 들 수 있다. '개'나 '고양이'는 그 단어가 의미하거나 가리키는 대상과 시청각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피카소 「바이올린」 1912

 

재현에서 멀어지다

피카소의 콜라주는 바로 '상징'이라는 자의적인 형태를 채택함으로써 '닮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재현 체계로부터 결별을 선언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는 한 장의 신문을 맞물린 퍼즐 조각처럼 두 조각으로 잘라내 콜라주한 것이다. 「바이올린」에서 신문 조각 중 하나는 목탄 드로잉과 겹쳐져 바이올린의 단단한 표면을 이루고, 깨알 같은 활자로 가득한 신문의 행들은 악기 표면의 나뭇결을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른쪽 상단에 치우쳐 있는 다른 하나의 신문 조각은 '쌍둥이' 신문 조각의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 형태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신문 조각의 활자 행들은 전통적으로 빛으로 가득한 대기를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 점묘법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이 오른쪽 상단의 신문 조각은 바이올린의 '형상'과의 관계에서 '배경'에 해당하는 기호를 구성한다. 

콜라주는 언어적 기호에서 시각적으로 자의적인 조건을 취했을 뿐 아니라 시각을 넘어 문학을 지나 정치 경제로 확장되는 서구 재현의 대개혁에 참여하고 있었다. 러시아 태생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에 따르면 콜라주가 이런 혁명을 시작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실험적인 예술에 대한 기대

미술사에서 피카소의 콜라주에 대한 해석은 앞서 말한 논의의 다양한 부분들이 서로 다투는 전쟁터와 같았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훌륭한 친구이자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는데, 그들의 유대 관계는 피카소가 저널리즘과 신문을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태도를 취하도록 지원했다. 아폴리네르는 일시적이고 전통적인 경험과 충돌하는 것을 가장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입장은 피카소가 유화라는 순수미술의 매체가 추구하는 영원성과 구성적 통일성을 공격하기 위해 신문 용지나 다른 싸구려 종이를 사용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견고함과는 거리가 먼 신문 용지의 성격은 처음부터 콜라주를 일시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한편 종이를 늘어놓고 고정시키고 풀로 붙이는 파피에 콜레의 과정은 순수미술의 절차보다는 상업적인 디자인 전략과 닮아 있다.

또한 피카소도 아폴리네르처럼 사회적으로 규정된 극한에서 미학적 체험을 찾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고, 오직 그곳에서만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자유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술사학자 토마스 크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런 경향은 지속적으로 아방가르드가 '저급한' 형태의 오락 공간에 경도되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시도가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탈출하고자 했던 바로 그 세력에 의해 언제나 그런 공간이 더 사회화되고 상품화되는 것으로 끝났음에도 말이다.

 

기용 아폴리네르 「넥타이와 시계 La Cravate et la montre」 1914,  「칼리그람 」(1925) 중에서  

 

아폴리네르는 1914년에 착수한 「칼리그람」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시각과 언어의 융합을 창안하여 피카소의 콜라주에 응답했다. 글자 기호를 촘촘히 배열하여 그래픽 이미지로 만든 칼리그람은 이중적인 '도상'이 된다. 예컨대 회중시계 모양을 그래픽으로 형성하고 있는 글자들은 문자 형식으로 표현된 "드디어, 12시 5분 전이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시각적인 차원에서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글자들이 광고나 상표에 사용된 생생한 그래픽 효과를 띠게 됐다면 「칼리그람」은 '상징'이 끝없이 변형되도록 하기 위해 명확한 '도상'을 피했던 재연에 대한 피카소의 도전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저버린 것이다. 말라르메의 시에서 기표가 분리되어 "그/그녀의 금"이 "금"이라는 소리와 함께 암암리에 시의 '울림'을 함축하는 것으로 증폭되는 것처럼 피카소의 기호는 서로 포개져서 시각적으로 변형되고 계열체의 대립항을 생성한다. 이것은 일찍이 「바이올린」에서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외 마르 병, 잔, 그리고 신문」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벽지를 요리사 모자 모양으로 잘라서 붙인 부분은 와인 잔의 가장자리와 잔에 담긴 액체를 분명하게 표현하므로 투명함으로 이해된다. 한편 아래쪽에 붙인 벽지에서 '요리사 모자 형상'을 잘라낸 자리는 와인 잔의 다리와 받침의 불투명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탁자보 구실을 하는 벽지를 배경으로 대상의 형체를 나타내고 있다. 같은 형태(요리사 모자 모양)의 기표들을 공간적으로 반대 위치에 둔 것(벽지의 겉면이 위로 오게 하여 뒤집음)은 의미의 역전을 반영한다. 이렇게 서로의 의미를 생산함으로써 계열체가 완벽하게 표현된다. 

 

피카소 「Bottle of Vieux Marc, Glass, and Newpaper」 1913

 

피카소는 다양한 콜라주의 표면에서 말라르메가 이야기하도록 했다.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 피카소는 옛 애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목소리에, 말라르메가 세련된 패션 잡지 《데르니에르 모드》에서 필명으로 기고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겹쳐 놓았다. 또 피카소가 오려 붙였던 신문 조각의 표제인 "Un coup de thé"는 말라르메의 가장 급진적인 시 「주사위 던지기(Un coup de dés)」와 발음이 비슷하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부족 미술이 제시한 왜곡과 단순화를 모델로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칸바일러는 "화가의 눈을 뜨게 한 것은" 피카소가 소장한 특별한 가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면은 코트디부아르의 그레보 부족의 것으로 '계열체"의 모음이다.

피카소가 시도한 구축 조각은 그레보 가면의 효과를 보여 준다. 얇은 금속판과 노끈 철사로 만들어진 1912년 작 「기타」는 하나의 금속면에 불쑥 항공을 만들어 악기의 형태를 갖췄는데, 이것은 그레보 가면의 눈과 상당히 흡사하다. 마치 바탕 위에 형상처럼 각각의 평면은 평면 부조 위를 맴돌며 일찍이 「바이올린」에서 훌륭하게 탐구된 바 있는 계열체의 형태를 보여 준다. 그레보 가면의 교훈을 제일 먼저 적용한 콜라주는 「기타, 악보, 그리고 잔」이다. 이 작품에서 각각의 콜라주 조각은 평평한 종이를 배경으로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타 맨 아래쪽의 검은색 초승달 모양은 기타가 놓인 탁자에 드리워진 그림자인 양 접혀 있고 기타의 항공은 악기 몸통의 앞면에 속이 찬 대롱이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 「Guitar, Sheet Music, and Glass」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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