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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10년대 노트

1911년 입체주의, 피카소, 브라크

by 책방의 먼지 2019.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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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피카소가 '빌렸던' 이베리아 석조 두상을 원래 소장 기관인 루브르 박물관에 돌려준다. 원시주의 양식을 변화시킨 피카소는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분석적 입체주의를 전개한다.

 

분석의 등장

1911년 말엽 피카소의 예술 세계는 이베리아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던 원시주의로부터 엄청나게 멀어져 있었다. 1907년과 08년에 그가 모델로 삼은 이베리아 석조 두상과 아프리카 가면은 '왜곡'의 수단이었다. 이 '왜곡'이라는 말은 1929년 미술사학자 카를 아인슈타인이 입체주의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왜곡이 "분석과 파편화의 시기를 거쳐 종합 시기"로 갔다고 서술했다. 또한 '분석'은 대상 표면의 파편화와 주변 공간의 통합에 적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분석적'이라는 용어가 입체주의에 붙었고 '분석적 입체주의'는 1911년 피카소와 브라크가 의도한 변화를 달성하는 데 지침이 됐다. 그 무렵 피카소와 브라카는 수세기에 걸친 자연주의적 회화의 통일된 원근법을 폐기하고 커피 컵과 와인 병, 얼굴과 토르소, 기타와 외다리 테이블 등을 약간 기울어진 여러 개의 작은 평면으로 전환시키는 회화 언어를 고안해 냈다. 

'분석적' 입체주의 단계에 속하는 모든 작품에서 몇 가지 일관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화가가 사용하는 색채의 범위가 총천연색 스펙트럼에서 절제된 모노크롬으로 축소된 점이다. 둘째는 마치 롤러로 인체의 양감을 눌러 없앤 것처럼 공간이 극단적으로 평면화돼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인체의 윤곽이 활짝 열리고, 남아 있는 약간의 주변 공간이 파괴된 윤곽선에 경계 안으로 손쉽게 침투하게 된다. 셋째는 이처럼 폭발적인 과정의 물리적 잔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시각적 언어이다. 

이런 시각적 언어는 기하학적 경향을 보여 주며 '입체주의'라는 명칭을 뒷받침한다. 그중 하나는 그림의 표면과 어느 정도 평행한 얕은 평면이다. 다른 하나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선으로 인해 전체 표면 여기저기에 그리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주의적인 세부 묘사에서 나타나는 작은 꾸밈음들이 있다.

여기서 형태나 배경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극히 미미한 정보만 가지고 볼 때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해석들은 신기하다. 많은 비평가와 시인, 저술가들은 입체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사실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난 이 운동이 오히려 묘사 대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위치에서도 삼차원적인 대상의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연적인 시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입체주의는 단일 원근법을 폐기하고 정면과 함께 측면 및 뒷면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써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사물의 모든 면을 제시한다. 즉 사물의 주위를 돌아다녀야 볼 수 있는 장면들을 합성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술가들(기욤 아폴리네르 「입체주의 화가들」 등)은 단순한 지각적 사실주의에 대해 개념적 지식의 우위를 설정하면서 불가피하게 과학의 언어에 의지했다. 원근법의 파괴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향한 움직임으로, 독특한 공간 배치의 동시성을 사차원적 기능으로 묘사했다.

 

회화로서의 법칙

입체주의의 발원에서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는 입체주의가 오로지 회화적 대상의 통일을 이루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때 회화적 대상의 통일이란 타협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요소의 필연적인 융합으로, '실제' 대상을 묘사한 양감과 (화가 앞에서는 세상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실제'인) 화가에게 주어진 물리적 대상의 평면성, 즉 캔버스의 평면을 융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입체 효과를 가능한 최소화하여 묘사된 양감(오직 회색 단계의 명암법)이 캔버스의 평면과 양립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에 대한 견해처럼 근대 과학과 보조를 맞추어 세계에 대한 경험주의적 자료를 개념적으로 완전히 이해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림 대상의 자율성과 내적인 논리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입체주의에서 회화 외적인 동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와 같은 설명은 피에트 몬드리안처럼 순수 추상미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하는 작가들에 대한 해석과 일치한다. 몬드리안이 과학과 산업의 발전이라는 근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인 화가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화가의 영역을 지배하는 논리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후에 이것은 (모더니티와 대조적인) '모더니즘'이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60년대 초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이론을 체계적으로 진술하면서 모더니즘 회화는 회화 작업을 "고유의 관할" 영역에서 자연의 법칙보다는 회화의 법칙을 보여 주는 것으로 재현함으로써(따라서 "각각의 미술 분야마다 독특하고 다른 분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적 합리주의와 계몽 운동의 논리에 따른 접근법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분석적 입체주의를 두 가지 유형의 평면성을 융합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파편화된 대상을 점점 더 표면에 가깝게 밀어내고 있는 기울어진 평면의 "묘사된 평면성"과 표면 자체의 "문자 그대로의 평면성"이 그것이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1911년에 이르러 브라크의 「포르투갈인」과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가지 유형의 평면성이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리드가 단 하나의 표면과 하나의 평면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자, 입체주의자들은 환영적인 장치를 추가했다고 한다. 입체주의자들이 사용한 환영적 장치는 전통적인 작업에서처럼 눈속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착시를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르주 브라크 「포르투갈인(이주민) The Portuguese(The Emigrant)」 1911년 가을~12년 초

 

올라야 할 산

우리의 눈이 입체주의 회화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업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브라크의 작업은 투명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반면, 피카소의 작업은 더욱 조밀하고 촉각적인 특성을 보인다. 이는 조각에서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한 피카소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밀도의 압축감과 촉각적인 경험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학자 레오 스타인버그로 하여금 두 미술가의 관심사를 혼합함으로써 각각의 그림을 볼 때 우리의 시야를 흐리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세잔의 후기 작업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은 파사주의 잔상효과에 대한 브라크의 관심과는 다른 것이었다. 피카소가 관심을 가진 것은 세잔의 후기 작품에서 발견되는 분열 효과였다. 여러 정물들 중에서 탁자 위의 대상들은 시각적 공간에 점잖게 진열된 반면 탁자가 놓인 바닥은 화가(관람자)의 위치로 접근하면서 널빤지가 우리의 발밑에 깔린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각 대 촉각으로 감각 체험 기관의 극적인 분열이 일어난다. 여기서 화가는 시각적인 회의론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화가가 장악한 유일한 도구는 시각이지만 깊이감은 직접적인 시각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모리스 레이날은 1912년 「버클리의 이상주의」를 인용하여 시각에 의존하는 회화의 "부적절성"과 "오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런 회의론을 건드렸다. 우리가 봐 왔던 것처럼 비평가의 일관된 이런 입장은 시각을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다는 것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낫지 않는 종기처럼 더욱 격화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이런 시각과 촉각의 분열이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경제적으로 명시된 작품은 분석적 입체주의의 종말이 임박한 1912년 봄에 그린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이다. 피카소는 타원형 캔버스의 테두리를 따라 긴 밧줄을 붙인 작은 정물을 만들었다. 이 정물은 일반적인 회화의 주어진 틀 안에서 우리의 시각 평면인 수직 바탕을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타원형 탁자의 표면에 배열돼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밧줄은 탁자의 가장자리가 되면 프린트된 유포는 탁자보 구실을 한다. 탁자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다이어페인(얇고 투명한 막)'의 수직 위치와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수평 위치는 촉각을 시각과 별개로 선언하는 신체적인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투명성에 대한 브라크의 헌신은 그가 시각예술의 가시성에 충실했다는 것, 다시 말해 다이어페인으로서의 회화 전통에 순응했음을 나타낸다. 브라크의 「J. S. 바흐에 대한 경의」(1911~12)는 악보대 뒤쪽의 탁자 위에 바이올린이 놓여있다. 악보대에는 'J.S.BACH'라는 제목의 악보가 꽂혀 있다. 여기서 각 대상은 군데군데 보이는 명암으로 인해 다른 대상 뒤에서도 분명하게 읽히며 정물은 마치 레이스 커튼처럼 우리 눈앞에 드리워진다. 

 

피카소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Chair Caning」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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