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마티스의 「춤 II」와 「음악」이 파리 살롱 도톤에서 비난받는다. '장식' 개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이 작품들에서는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 만큼 방대한 색면이 펼쳐진다.
눈을 멀게 하는 미학
「스페인 정물」은 시선을 집중시키기 어려운 작품이다. 관람자는 가지를 뻗어 나가는 아라베스크 무늬와 그 화려한 색채를 오래 쳐다볼 수 없다. 「생의 기쁨」에서도 그런 전조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정물화는 정도가 심하다. 관람자는 화면 전체를 단번에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통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즉 시선을 돌려야만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소란을 「음악」과 비교해보자. 얼핏 보기에 이 거대한 구성에서 보이는 침착성은 정물화의 들뜬 상태와 대조적이다. 그러나 실제 크기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의 4미터에 가까운 그림과 마주한 관람자는 또다시 지각의 난제에 부딪힌다. 형상 하나하나에 주목하려는 시도는 캔버스 나머지 부분의 강렬한 색채로 인해 좌절된다. 역으로 화면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려 들면, 배경의 청색과 녹색이 인물의 주홍색과 충돌하며 일으키는 떨림 때문에 더 이상 화면 전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형상과 배경이 서서히 서로를 제거해 나가면서 작품의 에너지는 증가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각에서 비롯된 이런 대립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 마티스의 의도였던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그 과도함에 흐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 '눈을 멀게 하는 미학'은 1906년에 이미 확립돼 있었다. 야수주의가 한차이던 시기에 마티스가 후기인상주의의 유산과 어렵게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08년에 이 미학은 다시 긴급한 문제가 된다. 그는 20세기의 미술 선언서 중 가장 명백한 논지를 지닌 글 중 하나인 「화가의 노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는데 자신은 무엇보다 시각의 분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표현에서 핵심이라고 말했다. "내게 있어 표현은 인간의 표정이나 격렬한 행위에서 발견되는 열정에 머물지 않는다. 내 그림의 배열 전체가 표현적이다. 형상들이 점유한 장소와 그것을 둘러싼 덩 빈 공간, 비례 그 모든 것은 나름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가 일생 동안 해 온 언급에 따르자면 "표현과 장식은 하나이다."
마티스가 젊은 피카소에게 응답하다
1908년 마티스의 미술과 이론이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로 피카소와의 경쟁을 꼽을 수 있다. 1907년 가을 마티스는 자신의 「생의 기쁨」과「청색 누드」에 대한 피카소의 화답이라 할 수 있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게 된다. 과거 마티스의 어떤 작품보다 훨씬 철저하게 원시주의를 실현한 이 작품을 본 마티스는 심기가 불편해졌으며, 여기에 응수할 필요를 느꼈다.
마티스의 작품 중 가장 섬뜩하고 비어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대작 「목욕하는 사람들과 거북이」가 그 첫 번째 응답이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메두사 효과'에 맞서려는 듯 마티스의 거대한 누드들은 관람자를 노려본다.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마티스의 장식은 비잔틴 모자이크처럼 색조가 조금씩 다른 단색 띠들로 환원됐다. 녹색은 잔디를, 청색은 물을, 녹청색은 흐린 하늘을 나타낸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의 풍경에 대한 암호이다. 이 풍경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곳이며, 우리를 초대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에 내재된 깊은 우울을 감지한 슈킨(마티스의 후원자)은 다른 수집가에게 팔린 것을 애석해하며 대신할 만한 다른 작품을 의뢰했다. 이에 마티스는 앞의 작품보다 흡인력은 부족하지만 이후 작품 경향을 암시하는 작품인 「공놀이」를 제시했다. 더 밝은 색이 쓰였지만 「목욕하는 사람들과 거북이」만큼이나 '풍경'이 비어있는 이 작품에서는 형식적인 리듬감이 전체 구성을 활성화시킨다. 여기서 애매모호한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왜곡된 얼굴은 더 이상 마티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마티스의 인물들의 생김새는 간략하게 표현됐다. 「목욕하는 사람들과 거북이」에서 완전히 싹트지 못한 시각적 리듬이 이 작품에서는 캔버스를 통합하고 있다.
다음 단계인 「빨간색의 하모니」는 마티스가 일생 동안 회화에서 실현하고자 한 기획이 최초로 실현된 작품이다. 관람자의 시선은 긴장감이 팽팽한 표면에서 튕겨 나가고, 전 방향으로 굽이쳐 나가는 구성으로 인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격렬한 주제를 다룬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님프와 사티로스」에서 마티스는 마지막으로 피카소처럼 구심점이 있는 구성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마티스의 이후 작품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관람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강렬한 색채로 관람자를 압박하는, 그림으로 채워진 벽이었다. 이런 언급에는 일종의 폭력성이 암시되어 있다. 이제까지 마티스를 다룬 수많은 글들은 그를 '행복'의 화가로 치켜세우거나 반대로 '쾌락주의'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그의 미술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특정 형태의 공격성은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를 향한 맹렬한 비난들은 마티스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1905년 살롱 도톤에 출품한 「사치, 고요, 쾌락」부터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한 이런 비난들은 1905년 야수주의 스캔들과 1906년 「생의 기쁨」을 거쳐 1910년 「춤 II」와 「음악」에 이르면 공공연한 것이 된다. 이 마지막 두 작품에서 표출된 마티스의 '장식' 개념은 회화의 전통 뿐 아니라 보는 것의 전통까지, 전통이라 불리는 것의 면상을 한대 갈기는 것이었다.
화면을 일으키는 '장식들'
'장식'개념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1910년 살롱전에서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후기인상주의에서 시작돼 야수주의와 입체주의에 의해 심화된 재현의 위기 이후, 장식적인 특성이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회복시키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당시 요구됐던 퓌비의 신고전주의적 수사와 '장식적' 구성으로의 복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티스가 "장식적인 패널화"라고 주장하면서 살롱전에 제출한 「춤 II」와 「음악」에 비평가들은 또다시 분노했다. 이 그림들은 벽을 얌전하게 장식하면서 우리의 눈에 위안을 주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친 사람이 거칠게 그린 그림, 다시 말해 액자에서 소용돌이쳐 나올 듯 위협하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향연을 광고하는 전단지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런 반응의 주요 원인은 분명 강렬한 색채 때문이겠지만 작품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충격적인 효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춤 II」와 「음악」에 사용된 색채가 던진 충격은 40년대 후반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의 거대한 캔버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회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또한 이런 색채 사용은 "1제곱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제곱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는 마티스의 원칙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됐다.
이 작품들이 고전주의 권위를 와해시키는 위협적인 시도로 간주됐던 이유는, 결국 마티스가 이 작품들을 통해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액막이 포즈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춤 II」와 「음악」만큼 텅 빈 캔버스지만 마티스의 '장식' 개념이 지닌 풍부한 양상을 드러낸다. 「춤 II」를 본 관람자는 끊임없이 움직임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시선 또한 휘감아 도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들뜬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은 훨씬 더 강력하고도 미묘한 방식으로 작품과의 평화로운 결합을 방해한다.
뻣뻣한 자세로 서로를 외면하는 그들은 이제 관람자를 노려본다. 마티스 또한 이 작품의 '침묵'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것이 부동 상태에 놓인 작품 「음악」은 휘감아 도는 「춤 II」의 움직임과 대조적이다. 악사 세명의 입을 나타내는 검은 구멍은 너무도 음울하며 바이올린 주자가 활을 그어 내리는 순간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당대 러시아 최고의 평론가 중 하나인 야코프 투겐홀트는 살롱 비평문에서 「음악」의 인물들을 "여태껏 없었던 최초의 악기, 그 소리에 최면이 걸린 늑대 소년"으로 묘사했다. 「음악」이 피카소의 매음굴 장면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이론과 연루되어 있음을 이 은유만큼 잘 지적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음악」은 「아비뇽의 아가씨들」보다 훨씬 더 늑대 인간의 꿈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투겐홀트의 은유에 하나의 단서를 덧붙어야 한다. 그것은 최면에 걸린 것은 악사가 아니라 관람자이다.
이 최면은 갈피를 못 잡는 우리의 지각에서 비롯된다. 형상에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무력감은 전체 화면을 단번에 포착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전이된다. 마티스의 '장식' 개념의 위대함은 듬성듬성한 구성으로 그런 전환을 간파하기 어렵게 만든 점에 있다. 관람자의 시선을 계속 움직이게 하려면 당연히 밀집된 구성을 취해야 마땅하지만 마티스는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은 장식 형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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