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95~1941)가 베를린에서 '창' 연작을 전시한다. 유럽 전역에서 초기 추상의 패러다임과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의와 논쟁
대개 추상에 대한 표준적인 정의들은 이상화와 관련돼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의하면 형용사 '추상적인(abstract)'은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상적인", "이론적인"을 의미하며 도사일 때는 "빼다", "없애다", "분리하다"를 뜻한다. 이런 의미들은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며 이상적인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화가들에게는 적합했지만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 혹은 실용적인 디자인의 세속적 성격을 강조한 화가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모더니즘 추상 내내 지속됐던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대립은 '비대상적' 혹은 '순수한'과 같은 유사한 용어들로도 해소되지 않았다. 정의상 추상은 비대상성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대상성'을 우선시한 화가들이 많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미술이 실재 대상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길 바랬다. 들로네, 레제, 아르프, 말레비치, 몬드리안이 추상을 가장 리얼리즘적인 양태라고 단언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추상이 '순수한 것'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의 최종 단계로 칭송되었던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순수성은 더 이상 순수한 것으로 볼 수 없는 매체의 물질 요소들(물감과 캔버스)로 환원된다. 결국 추상에 대한 최상의 정의는 이런 모순을 지연시키는 변증법적으로 작동하게 하든 관계없이, 그 모순을 필연적인 것으로 포함할 때 가능하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은 추상을 둘러싼 담론 역시 지배했다. 플라톤이나 헤겔, 유심론 철학의 영향을 받은 화가 중에서 말레비치, 칸딘스키, 몬드리안, 쿠프카는 특히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 신지학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상태로 진화하며 그 과정의 단계들은 기하학 형태로 표현이 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일부 미술가들은 추상에 대한 관념론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과학에 의존했다. 게다가 미술은 여타의 예술 장르, 특히 음악에 비유됐다.
유물론에 이끌렸던 추상화가들도 존재했다.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상품 생산 양식, 대중교통 수단, 이미지 복제 양식에 의해 변형된 세상에서 점차 추상화되어 가는 물질세계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추상이라고 생각했다.
입체주의는 추상적으로도, 사실적으로도 보이는 예술의 역설을 가진 최초의 양식이었고, 그런 역설은 추상미술가 대다수에게 중요한 화두가 됐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그의 회고전에서 "입체주의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의 논리적 귀결을 따르지 않았고, 순수한 조형적 요소들의 표현이라는 고유의 목적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라고 언급했으며 몇몇 화가들도 이에 동조했다. 일부 미술가들은 입체주의의 '분석적' 측면을 더욱 심화시켜 1912년과 13년에는 모티프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회화 작품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요소들이 있었고, 그 요소 자체가 의미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몬드리안의 그림에는 수평과 수직이, 들로네의 그림에는 빛으로서의 색채가, 말레비치의 그림에는 모노크롬 기하학이 지배적이다. 곧이어 이런 요소들은 추상을 지탱했던 두 가지 패러다임인 그리드와 모노크롬으로 귀결됐다.
그리드를 통해서는 선과 색채, 형상과 배경, 모티프와 프레임 같은 근본적인 대립이 해소되고(이런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어 몬드리안은 대가였다.) 모노크롬을 통해서는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회화를 지탱해 온 창과 거울이라는 패러다임이 부정되기 시작했다.(말레비치는 대담하게도 이 오래된 질서에 종언을 고했다.) 그리드와 모노크롬 패러다임이 상당 정도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1913년 들로네는 그리드를, 말레비치는 모노크롬을 전개함으로써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들로네는 회화 자체의 고유성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모델들을 조소했다. 들로네의 관심사는 오로지 '회화적 리얼리티'였다. 그는 색채를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구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색채는 깊이감과 형태, 그리고 운동감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들로네는 '동시적 대조'라는 법칙을 발전시켰다.. 색채 대조와 '동시성' 모두 망막에 직접 작용하는 회화적 이미지와 관련된다. 시각예술의 초월적 동시성은 언어예술의 세속적 시간성에 대립한다.(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콭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에서 연원하는 이런 대립은 후기 모더니즘 비평가인 그린버그와 마이클 프리드의 미학에서도 지속된다.)
'창' 연작을 계기로 들로네의 그림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창은 즉각적으로 추상화되며 자신이 매개하는 대상으로 용해된 매체이다. 이렇게 들로네는 낡은 패러다임인 '창으로서의 회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화했다. 이 연작 구성의 모델이 된 작품 「도시의 동시적 창」을 살펴보자. 평생 동안 그의 작업의 중심 모티프가 됐던 에펠탑은 이제 불투명한 색명과 투명한 색면 사이에서 허물어져 녹색 아치의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들로네는 입체주의적 단면을 극복하고 후기입체주의적 그리드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창문은 지시 대상을 갖는 동시에 회화적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이 된다. 들로네를 열렬히 지지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지적처럼 파리의 "숭고한 주제"와 회화의 "자명한 구조"는 창문을 매개로 화해한다. 들로네가 매체를 불투명하게 제시했던 것은 오로지 그 매체가 다시 투명하고도 비매개적인 것으로 사라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도시의 동시적 창」에서 커튼이 제거된 창은 마치 눈꺼풀 없는 눈과 같다. 여기서 빛으로서의 색채는 우리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하다. 그다음 들로네가 제시한 것은 모든 창이 제거된, 망막의 상태에 가까운 회화였다. 그 예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 중 순수 춯상에 가장 가까운 「원반」을 들 수 있다. 그저 색채 이론을 실현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돼 왔던 이 작품은 사실은 이후 50년 동안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었던 추상의 맹아를 간직하고 있다.(어떠한 지시 대상도 갖지 않으며 전적으로 시각적인 동시에 구조화된 캔버스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말레비치는 들로네와 다른 경로를 택했다. 말레비치는 '창으로서의 회화'를 순수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채색으로 가렸다. 최초의 완벽한 추상 작품 「검은 사각형」은 상징주의 미술과 자연주의 연극에 반기를 든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의 승리」의 무대를 위한 스케치였다. 여기서 원근법 구도를 가진 상자 안에 배치된 정사각형은 대각선에 의해 상부의 검은 삼각형과 하부의 흰 삼각형으로 분할된다. 이로써 말레비치는 빛이 어둠에 의해 잠식당하고 초월론적인 관점과 모더니즘적인 무한성에 의해 경험론적인 관점과 원근법적인 공간을 극복하는 '태양에의 승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말레비치가 선언한 것처럼 이런 '형태의 영도'이면에는 "창조적인 예술에 절대적인 순수한 감정"이 놓여 있다. 이때부터 절대주의는 그의 추상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
들로네는 창문의 투명성을 빛으로서의 색채라고 선언한 반면 말레비치는 태양을 정복한 검은 사각형의 승리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두 미술가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순수 시각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경로를 택했을 뿐이다. 들로네가 빛으로서의 색채로 모티프를 원자화하고, 말레비치가 태양의 일식으로 그 모티프를 어둡게 할 때조차도 이들은 모두 더 높은 차원의 리얼리티를 얻고자 다른 리얼리티를 희생한 것이다. 이런 변형을 통해 그들은 추상을 실재의 부정이 아니라 이상화라고 생각했던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연결된다. 이렇게 들로네와 말레비치가 매체를 물감과 캔버스와 같은 불투명한 물질 그 자체로 제시했던 것은 다시 그 매체를 추상의 의미인 감정, 영혼, 순수성에 투명한 것으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결론적으로 추상은 정신적인 효과와 장식적 디자인, 물질적 표면과 관념론적 창문, 하나의 작품과 되풀이 되는 연작 같은 대립을 갖게 하는 모순적인 양식이다. 여기서 가장 극명한 모순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다. 채색된 평면으로서의 회화, 즉 경험적 수준에서 물질로 드러난 매체와 초월적 질서의 지도로서의 회화, 즉 영혼의 세계로 인도되는 창과의 대립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보기에 이런 대립은 모순적이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현대적 사유는 대개 경험론적 탐구와 초월론적 탐구, 그리고 유물론적 입장과 관념론적 입장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긴장은 모더니즘 미술과 현대 문화 전반에서 모순으로 경험된다. 우리 문화가 모순의 양극 모두를 다루면서도 이런 외관상의 모순을 미학적으로 해결한 몬드리안과 같은 미술가들을 높이 평가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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