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 T. 마리네티가 최초의 미래주의 선언을 《르 피가로》 지 1면에 발표한다. 아방가르드는 처음으로 매체와 결합했으며, 스스로를 역사와 전통에 저항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1909년 2월 20일에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는 최초의 미래주의 선언인 「미래주의 창립 선언」을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에 발표했다. 미래주의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리는 이 사건은 미래주의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암시하는 것이었다.
첫째, 미래주의는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가 연계하기를 원했다. 둘째, 이 사건은 대중문화 생산에 관련된 모든 기법과 전략들이 이제 아방가르드의 선전선동에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을 예견했다. 셋째, 미래주의가 테크놀로지의 선진 형식과 예술 창작의 융합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역동성", "대상의 파괴", "형태의 파괴자로서의 빛"을 찬양한 미래주의의 구호들은 기계적인 것을 찬양했으며, 고속 주행 중인 자동차가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이것은 그들이 조각 작품이 지닌 유일무이한 희소성보다 산업 제품을 선호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래주의는 이 사건을 통해 아방가르드는 본성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더라도) 진보적인 좌파 정치를 지향하고 그와 연합한다는 전통적인 가설을 뒤집을 채비를 갖추게 된다. 미래주의는 1919년 이탈리아의 파시즘 이데올로기 형성에 정치적. 이념적으로 동화됐던 20세기 첫 아방가르드 운동이 됐기 때문이다.
침체에서 선동으로
미래주의 미술가들이 무엇을 모델로 삼았는가의 관점에서 등장 배경은 복합적이다.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프랑스 신인상주의나 분할주의 회화, 20세기 초반의 입체주의를 모델로 삼았다. 미래주의 형성에서 특별히 이탈리아적인 것이 있다면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를 뒤늦게 수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선언이 발표됐을 때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 카를로 카라(Carlo Carra, 1881~1966) 같은 주요 인물들은 여전히 1880년대 분할주의라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미래주의는 새로운 회화와 조각 미학을 수립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재빠르게 짜집기했는데, 그 빠른 속도 자체가 절충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마리네티 선언을 뒤따른 다른 미래주의 미술가들의 선언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 선언들을 종합하면 미래주의 전략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래주의는 서로 다른 감각들, 즉 시각.청각.촉각 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킨 공감각과, 정지하고 있는 신체와 운동하고 있는 신체의 구분을 분괴시킨 운동감각을 강조했다. 둘째, 초기 영화나 사진의 영향으로 발전한 시각과 재현의 테크놀로지와 회화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고자 했다. 셋째, 과거 문화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부르주아 유산을 맹렬히 공격한 미래주의는 예술과 발전된 테크놀로지를 통합할 것을 열정적으로 역설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의 테크놀로지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 운동은 파시즘으로 빠지게 된다.
신체를 재현할 때 운동감을 필수적인 요소로 삼으려는 시도는 미래주의가 스트로보스코프장치(물체의 고속 회전 상태를 촬영하는 장치)의 초기 형태인, 프랑스의 과학자 에티엔-쥘 마레가 고안한 '크로노포토그래피(동체 연속 사진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발라와 보치오니는 마레의 기계 장치가 주는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분할주의식 회화 표현법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작품은 이상하리만치 뒤쳐지고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됐다. 이것은 미래주의자들이 단일하고 정적인 미술이라는 회화의 지위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로노포토그라피를 채택하려 했으면서도, 회화적 기표가 테크놀로지 영역을 순수하게 모방하는 관계(예컨대,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여 운동을 묘사하는 방식)에 머무르려고 했을 뿐, 산업 생산의 반복적인 형식을 채택하는 것 같은 구조적인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가 없는 미래
미래주의의 가장 흥미로운 화가가 발라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발라는 1912년에 크로노포토그라피의 특징인 반복적인 윤곽선으로 대상을 재현하여 자신의 회화 세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발코니를 뛰고 있는 소녀」
나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같은 작품들은 운동을 지각할 때의 동시성을 그대로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913년에 발라는 속도, 시간성, 운동, 시각적 변화를 묘사하는 더 적절한 방식을 찾기 위해 재현을 완전히 거부하고, 최초로 설득력 있는 비재현적 회화 모델을 탄생시켰다. 구상적인 시도를 모두 없앤 이 작품들은 연속 동작과 속도를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구조적인 틀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으며, 대상 고유의 색과는 전혀 다른 비재현적인 색채를 사용했다. 이렇게 형성된 구성과 색의 모체(matrix)는 르네상스 원근법을 새로운 현상학적 공간으로 변형시킨 입체주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발라는 완전히 비재현적 전략을 통해 회화 공간을 기계적이거나 광학적인, 혹은 시간적인 공간으로 바꾸려고 했다.
보치오니의 조각은 미래주의가 공간에 놓인 물체를 운동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골몰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공간에서의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는 로봇 같기도 하고 양서류 같기도 한 모호한 형태를 통해 다시 한 번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라피에서 가시화된 운동의 자취를 조각적 신체에 결합했다. 이 작품에서는 정적인 재현에 지각의 유동성이 추가되면서, 공간적 연속성과 단일하고 전체적인 조각 대상 사이에 특유의 혼성이 발생한다. 그러나 보치오니의 「달리는 말과 집의 역동성」에서는 운동 사진을 환영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미래주의의 감수성이 거부되고 그 대신에 댓아은 정적인 것이 된다. 이 작품의 동시성과 운동감각은 서로 다른 재료를 단순히 병치시키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각 재료의 파편화된 정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최초의 완벽한 비재현적 조각인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제작한 추상 조각에 견줄 만하다.
아방가르드의 감수성과 대중문화를 융합하려는 자가당착의 시도는 콜라주가 미래주의의 주요 기법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의미에서 카라의 「개입주의자들의 시위」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절정에 오른 미래주의 미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미래주의가 사용한 모든 장치를 동원한 이 작품에서는 분할주의 회화의 유산, 전통적인 지각 공간에 대한 입체주의적 파편화, 신문 오린 것과 광고에서 가져온 발견된 재료를 볼 수 있다. 반대 방향으로 지나는 대각선이 십자로 교차되는 선을 중화시키고 전체적으로 소용돌이를 만드는 콜라주 구성에서 비롯된 시각적 역동성에서 운동감각이 드러나며,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언어의 발음과 그것을 도해한 기표의 병치 같은 장치들도 확인할 수 있다.
파시즘과 미래주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발흥하면서 미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태도가 주목을 받았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찬양, 반전통주의적 입장, 과거의 문화에 대한 혹독한 비난, 부르주아 문화유산의 격렬한 변형 등 이 모든 요소가 뿌리부터 미래주의의 본성에 맞닿아 있었다. 전쟁은 그 자체로 테크놀로지의 가장 앞선 사례였기 때문에 이 요소들은 이제 미술과 전쟁을 통합할 것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데 동원됐다.
최초의 아방가르드주의자인 마리네티는 아방가르드와 전통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균열의 최전선에 미래주의 문화를 위치시키고, 아방가르드를 역사적 연속성과 역사적 기억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무대로 구성했다. 게다가 전후에 미술과 선진 테크놀로지를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일치시키려는 마리네티의 시도는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정치 우파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런 경우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미래주의가 유일하다.
1916년 보치오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산텔리아도 같은 해 전사하자 세베리니와 카라 진영은 정치적, 미학적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마리네티가 20~30년대에 미래주의의 논의들을 미술. 문학. 정치학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긴 했지만, 이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미래주의는 아방가르드 운동이라는 길을 잃어버렸다.
카라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는 1917년에 페라라의 군병원에서 첫 만남을 가졌는데 이를 계기로 아방가르드 내부의 또 다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카라는 하룻밤 만에 형이상학 회화에 동참하기 위해 이제까지 관여했던 모든 미래주의 작업들을 포기했다. 그만큼 데 키리코의 발견은 당시 이탈리아 아방가르드 사유를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카라는 앙리 루소 같은 '원시주의적' 화가와 초기 르네상스의 조토와 우첼로 같은 화가의 기하학적 입방체로 그 관심을 돌렸고, 그들을 "조형 세계"의 창조자, 혹은 "조형적 비극"의 창조자라고 불렀다.
「형이상학적 뮤즈」에서 카라는 데 키리코의 시각적 레퍼토리를 받아들였는데, 그는 지도와 건물 모형 같은 기하학적 입방체와 채색된 무대 장치, 그리고 석고로 된 테니스 경기자 인형을 기울어진 바닥에 놓았다. 카라가 밀라노 전시회에서 선보인 모든 작품에서 데 키리코 회화에 등장하는 궁정 뜰과 광장에 드리운 밤의 침묵이 그대로 발견됐다.
전쟁이 초래한 엄청난 변화에 대한 찬양이 지나가자 전통에 대한 애국주의적 감수성이 찬양되기 시작했다. 카라와 세베리니가 미래주의를 떠나 데 키리코의 추종자가 된 것은 반모더니즘 혹은 대항모더니즘의 첫 번째 사례이자 아마 가장 열정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런 흐름은 결국 다양한 운동의 형태로 전 유럽에 퍼지게 됐으며 이들은 모두 "질서로의 복귀"라 불리게 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래주의 활동이 다시 격렬해진 첫 4년 동안 키리코와 카라의 미술에서는 역사적 기억이 통렬하게 비판됐으며, 역사적 기억은 두 미술가의 이후 작업에서도 중심 주제로 계속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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