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세잔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세잔의 죽음과 1년 전 개최된 빈센트 반 고흐와 조르주 쇠라의 회고전을 계기로 후기인상주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야수주의가 그 뒤를 잇는다.
후기인상주의의 4인의 전도사
마티스는 네 명의 후기인상주의자들(반 고흐, 고갱, 쇠라, 세잔)의 화풍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묘사의 기능에서 색채와 선을 분리시켜 그 고유의 가치와 표현적 기능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그는 회화의 기본 요소들이 이러한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학자처럼 그것들을 분리한 다음 새롭게 재조합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쇠라는 실험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화가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빛의 비물질성을 얻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행한 분석 및 합성 과정을 통해 탄생한 물질적이고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 회화의 요소들은 화가들에게는 이제 하나의 이상이 됐다. 근본으로 회귀하는 것도 마티스가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후기 인상주의에서 공공연한 일이 됐다. 마티스는 명백한 방법론을 지닌 유일한 후기인상주의 분파인 분할주의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마티스의 모더니즘 실험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지만 시의 적절했다.
마티스와 야수주의
영국의 비평가이자 화가이며 선생인 로렌스 고윙의 말처럼 "야수주의는 20세기의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준비가 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야수주의가 한철을 넘기지 못한 가장 짧은 혁명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야수주의자들은 수년간 서로 알고 지냈으며 연배가 가장 높은 마티스를 지도자로 생각했다.
1905년 2월에 드랭의 권유로 마티스가 블라맹크의 작업실을 방문한 사건은 야수주의 결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치, 고요, 쾌락」을 막 완성한 마티스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때, 블라맹크의 공격적인 색채 사용을 접한 마티스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티스는 드랭과 함께 여름 내내 스페인 국경에 있는 콜리우르에서 지내며 블라맹크의 대담한 작풍을 극복하게 된다. 드랭의 격려와 둘이 같이 본 고갱의 뛰어난 작품 덕분에 마티스는 4개월 내내 작품 제작에 매달릴 수 있었고 이렇게 제작된 마티스의 많은 작품은 이후 야수주의의 핵심 작품이 된다.
마티스의 야수주의 작품들, 특히 콜리우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린 「모자를 쓴 여인」에 대한 대중들의 거센 거부는 1863년 마네의 「올랭피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트루드와 레오 스타인이 이 악명 높은 그림을 구입했다는 소식도 언론의 빈정거림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의 야수주의 동료들은 마티스가 얻은 이 급작스러운 명성 덕을 보았으며 그가 새로운 미술 유파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공고해지자 그의 미술을 모방했다. 그러나 이후 브라크를 제외한 마티스의 추종자들은 1905년 여름에 개발된 이 회화 언어를 반복하거나 진부하게 만드는 수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다. 콜리우르에서의 대발견은 마티스에게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계기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후기인상주의의 네 가지 흐름을 종합하게 된 마티스는 「생의 기쁨」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회화적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마티스의 체계
마티스의 야수주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분할주의적 붓질을 점진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마티스는 순색의 사용과 보색 대비를 통해 색채 간의 긴장감이 유지되도록 회화 평면을 구성하라는 시나크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랐지만, 세잔과 쇠라의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인 일률적인 붓의 사용(형상과 배경을 가리지 않고 화면 전체에 고르게 작용된 점묘와 구조적인 붓질)을 포기하고 후기인상주의의 다른 주요 요소들을 도입했다.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주관적인 색채로 이루어진 평면과 리듬감있는 두꺼운 윤관선을 도입했고, 선의 두께와 간격을 조정해서 선의 효과에 미세한 차이를 주는 방법은 반 고흐의 드로잉에서 가져왔다. 세잔에게서는 총체화되는 장으로서의 회화적 표면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채색되지 않고 희게 남은 부분을 포함하여 회화 표면의 모든 것이 회화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구조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세잔과 마찬가지로 마티스는 화면에 대비되는 색채를 분배하여 그 색들이 회화 표면 전반에서 공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야수주의 시절 미완의 작품 중 하나인 「마티스 부인의 초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면 전체에 분포된 주황색, 녹황색, 적분홍색이 각각 주변에 있는 다양한 녹색과 조응한다. 처음에 온화한 수준에 머물렀던 색채의 조화는 점차 가열돼 가장 높은 채도로 캔버스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마티스는 야수주의 살롱전이 끝나자마자 지난 몇 달간의 성과를 토대로 일생 동안 그의 지침이 된 원칙을 발견했다. 그것은 "1제곱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제곱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마티스는 1905~06년경 그린 「실내, 콜리우르에서」에 등장하는 붉은색 면에 대해 언급하던 중, 같은 물감으로 칠한 색면이라도 다른 색조를 띤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색채 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표면과 양의 관계라는 발견은 중대한 진전이었다. 색채와 드로잉의 근본적인 통합에 대한 세잔의 말을 떠올린 마티스는, 시냐크가 특히 아꼈던 자신의 작품, 「사치, 고요, 쾌락」에서 색채와 드로잉이라는 두 요소가 분리되고 심지어는 대립하고 있다는 불평을 시냐크에게 털어놓았다. 마티스는 이제 자신이 공식화시킨 "질=양"의 방정식을 통하여 세잔이 왜 색채와 드로잉이라는 전통적인 대립을 제거했는지 이해하게 됐다. 비례가 조금만 달라져도 색은 변조될 수 있으므로, 면 분할은 그 자체로 색채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마티스가 썼듯이, "색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관계를 통해 그리고 오직 관계에 의해 드로잉은 실제의 색이 아닌 다른 강렬한 색으로 채색 가능하다." 1905년 초, 흑백 목판화 연작을 제작하다가 이 원리를 깨달은 마티스는 「생의 기쁨」을 제작할 무렵에는 이미 그 발견을 적용하고 검증할 준비가 돼 있었다.
물감으로 이루어진 부친 살해
「생의 기쁨」는 가장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ㅈ가품을 구성하는 신중함 위에 콜리우르에서 했던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배경을 구상한 후 개별적으로 습작했던 인물상을 홀로 또는 무리지어 배치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 방대한 작업이 거친 절차만큼 아카데믹한 것은 아니었다. 조정되지 않은 순색의 색면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적용됐고, 그 결과 그림에는 원색 간의 과격한 충돌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밝은 색의 두터운 윤곽선이 그처럼 경쾌한 아라베스크 리듬을 형성하거나, 인체가 수은처럼 녹아내리는 듯, '왜곡'된 전례는 없다. 이 충격적인 작품을 통해 마티스는 분명 서양 회화 전통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려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자 도상학적인 수준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
「생의 기쁨」의 몽타주적인 구성의 특징, 즉 "꿈 이미지나 환영을 특징짓는 이접적인 이행"에 근거하여 워스는 이 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했다. 워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하나의 판다지 장면이자, 프로이트가 밝힌 다양한 유아기적 성에 대응하는 일련의 모순적인 성적 충동(나르시시즘, 자기성애, 사디즘, 노출증 등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뒤에 오는 거세 공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을 연상시키는 다의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형식이나 양식, 주제의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이 그림은 부친 살해를 담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무희들은 에꼴 데 보자르에 의해 공식화된 아카데미 규범의 강력한 권위가 완전히 몰락한 바로 그 순간을 축하하고 잇다. 그러나 마티스의 사례는 그런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 또한 일깨운다. 왜냐하면 아무런 길잡이 없이 상징적 부친을 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의 미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재창안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20세기 미술의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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