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식적으로 일관성이 없고 원시적 충동이 드러난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파블로 피카소는 미메시스적 재현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하「아가씨들」)은 하나의 신화가 됐다. 이 작품은 선언이며, 싸움터고, 근대미술의 전조이다. 이 작품이 대표작이 될 것임을 분명히 인식한 피카소는 이 작품에 모든 생각, 모든 정력, 모든 지식을 쏟아부었다. 피카소가 '가장 공들인'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남긴 열여섯 권의 스케치북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수많은 습작도 그에 합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근대 회화 중에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이후에는 현격히 관심이 줄어 활발한 논의가 뒤따르지 못했다. 사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심지어 거부됐다고 할 수도 있다. 뒤늦은 유명세는 전설을 낳기 마련인데, 특이한 점은 이런 현상이 작품의 주제와 형식적 구조에 연관돼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조장됐다는 사실이다. 「아가씨들」은 무엇보다 바라보기에 대한 것이고, 시각적 소환에 의한 외상에 관한 작품이다.
비평도 거칠게나마 비슷한 패턴을 겪는다. 앨프리드 H. 바가 1939년 뉴욕근대미술관 피카소 회고전의 도록으로 집필한 「피카소의 미술 인생 40년」을 기점으로 「아가씨들」은 정전이 되기 시작했다. 바의 독창적 해설은 1951년 「피카소의 미술 인생 50년」의 출간을 위해 최종적으로 수정, 탈고되면서 이작품에 대한 공인된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바의 설명은 작품이 공개된 후 꾸준히 제기된 거부의 목소리를 붕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견고하게 만들었다. 바의 관점은 1972년 레오 스타인버그(Leo Steinberg, 1920~)의 혁신적인 논문 「철학적 매음굴」이 발표되면서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 그 이전의 어떤 글도 스타인버그의 이 글만큼 「아가씨들」의 지위를 변형시키지 못했으며, 이후의 모든 연구는 스타인버그 글의 부연이라고 할 수 있다.
"과도기의 회화"?
스타인버그의 글이 출간되기 전까지 「아가씨들」은 '최초의 입체주의 회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즉 바는 「아가씨들」을 작품 자체보다는 그것이 공표하는 사조 때문에 더 중요하므로 "과도기의 회화"라고 주장했다. 바는 이 그림이 과도기의 회화라면 당연히 미완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칸바일러의 주장을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이 그림의 "통일성 부족"을 비판하면서 칸바일러의 주장에 주목했다.
바는 「아가씨들」을 위한 습작 세 점의 도판만을 책에 싣고 그것에 대해 최소한만 언급했을 뿐, 크리스티앙 제르보스가 펴낸 피카소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이미 실려 있던 다른 다수의 습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초기 습작에는 바로크 전통에서 파생된 연극적 배치를 보여 주는 일곱 명의 인물과 무대의 측면에 드리우는 통상적인 커튼이 등장한다. 중앙에 앉은 옷을 입은 선원과 선원을 둘러싼 다섯 명의 창녀들이 화면 왼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명의 의학도가 해골을 손에 들고 무대로 들어오고 있다. 바는 이 음울한 장면을 죗값에 관한 "일종의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알레고리나 제스처"로 봤지만 피카소의 이후 습작에서는 이런 장면 연출이 금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이를 그냥 간과해 버렸다. 바가 집필한 책의 최종 편집본에 따르면 "미덕(해골을 든 남자)와 악덕(음식과 여자에 둘러싸인 남자) 사이의 도덕적 대조에 함축된 모든 의미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인물 구성을 위해 제거됐고, 이 구성이 발전하면서 인물은 더욱 탈인간화되고 추상화된다."
스타인버그는 이미 상투어가 돼 버린 이런 관점 대부분을 폐기했다. 「아가씨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인물 구성"으로 환원돼 앞으로 도래할 사조를 알리는 단순한 전조(당시 입체주의에 대한 단순한 관점이 말하듯) 정도로 파악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피카소가 "메멘토모리의 알레고리"를 폐기하긴 했지만 성적인 주제까지 폐기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아가씨들」이 양식적으로 통일성이 없는 것은 서두르다 생긴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전략이었다.
스타인버그는 바의 "메멘토모리"를 거부하고 피카소가 제거한 알레고리가 "죽음 대 쾌락"이 아니라 "침착하고 초연한 학습 대 성적인 요구"에 관련된 것이라고 정정했다. 습작에 등장하는 책과 해골은 의학도가 이 그림의 참여자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으로, 심지어 의학도는 아가씨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소심한 선원으로 말하자면 그는 여기에서 무시무시한 여자들에게 뭔가 자극을 얻고자 한다. 여러 스케치에서 발견되는 선원의 양성적인 모습은, 그의 남근적 소유물인 탁자에 놓인 포롱(곤두선 주둥이를 지닌 포도주병)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선원은 곧 사라지고 의학도는 성별이 바뀐다. 완성작에서 의학도는 왼쪽에서 커튼을 젖히는 서 있는 누드로 대체된다. 반대로 아가씨들의 신체는 습작에서 남성의 신체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카소가 「아가씨들」을 작업하는 동안 그의 주제적 관심이 성적 차이 및 성적 공포에 관한 원초적인 물음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산적해 있다. 따라서 피카소는 알레고리를 포기하는 대신 이런 주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완성작에 나타난 양식적 불일치가 생겨나기 시작하며, 다섯 명의 창녀가 서로 철저하게 고립되고, 분명한 공간적 좌표가 제거된다. 엄밀히 살펴보면, 양식적 불일치는 바가 언급한 것보다 훨씬 심해서 화면 오른쪽의 '아프리카'측면에만 국한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왼쪽의 의학도를 대체한 아가씨의 손은 몸에서 잘려진 것처럼 보이며, 스타인버그가 지적했듯이 왼쪽에서 두 번째 아가씨는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회화 표면과 평행하게 수직으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누운 자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성작에서는 "전통적인 서사 미술의 규칙은 반서사적인 대항 원리에 밀려나게 된다. 이웃한 인물들은 공통된 공간이나 행동을 공유하지 못하고, 소통하거나 상호작용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홀로 관람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사건, 현현, 갑작스러운 등장이 여전히 이 그림의 주제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림의 대립극에 위치한 관람자를 향해 직각으로 돌아선다." 달리 말하면, 바로 작품의 양식적이고 장면적인 통일성의 부족이 회화를 관람자와 묶어 준다. 즉 이 그림의 핵심은 아가씨들의 무시무시한 시선, 특히 오른쪽에 의도적으로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들의 시선이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간주한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아가씨들의 "아프리카주의"는 관람자가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법이다.(그리스에서 유래된 "악을 피할 수 있는 힘을 가진"이라는 의미의 aportropaic는 피카소의 누드들이 지닌 위협적인 눈빛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단어다.) 피카소 내면 깊은 곳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강조한 윌리엄 루빈은 자신이 쓴 「아가씨들」에 대한 가장 긴 분량의 연구에서, 이 그림의 복잡한 구조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섹스와 죽음을 연결하는 고리와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다.
시선의 외상
이 그림에 대한 최근의 논문들은 프로이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원초적 장면"과 "거세 콤플렉스"를 다루는 여러 정신분석학적 설명들은 「아가씨들」에 놀랍도록 잘 적용되며, 알레고리의 제거 및 완성작의 야만성을 모두 설명해 준다. 먼저 프로이트의 가장 유명한 환자인 늑대 인간 세르게이 판케예프가 회상한 유년기의 꿈을 살펴보자. 소년은 꿈에서 창문이 열리고 움직이지 않는 늑대들이 그를 쳐다보자 뻣뻣하게 굳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이 꿈은 원초적 장면, 즉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 충격이 낳은 후유증이다.) 또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메두사의 머리에 관한 프로이트의 짧은 글을 생각해보자. 메두사의 머리는 여성의 성기(남자아이가 보면 거세 불안이 생겨난다.)이기도 하고, 거세 자체의 이미지(참수)이기도 하지만, 거세의 부정을 뜻하기도 한다. 거세의 부정을 의미하게 된 것은 뱀으로 이루어진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증식된 페니스이기 때문이며, 또한 메두사가 관람자를 돌덩어리, 달리 말해 죽긴 했지만 발기된 상태의 남근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가씨들」 앞에 서는 관람자는 스타인버그가 지적한 것처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래 어떤 작품보다 더 폭력적으로 자신을 부르는 창녀들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루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피카소는 '서사적' 방식(알레고리)을 '도상적' 방식으로, 즉 역사적 어조의 이야기("옛날 옛적에")를 개인적인 위협("날 봐라, 나는 너를 보고 있다.")으로 바꿔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서구 회화의 토대가 되는 일점 원근법에 확립한 관람자의 고착된 위치를 폭로하고, 그 위치를 굳어 버린 것으로 재확립해 악한 것으로 만들었다.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불리는 바로 이런 작용 덕분에 「아가씨들」이 지닌 힘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 작용을 통해 피카소는 관람 행위에 수반되는 리비도의 모순적인 힘을 강조했고, 그림 전체를 메두사의 머리로 만들었다. 매음굴 회화는 성애 예술의 오랜 전통에 속한다.(피카소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드가의 모노타입을 좋아하고 수집하고 싶어 했다. 그는 살면서 늦게야 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가벼운 도색화는 남성 이성애자 미술 애호가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 준다. 피카소는 이런 전통을 무너뜨린다. 즉 이야기를 방해하는 아가씨들의 시선은 서사적 장면 외부에 놓인 (남성) 관람자의 편안한 위치가 생각만큼 그렇게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 관람자에게 도전한다. 이 그림이 그토록 오랫동안 거부돼 온 것은 사실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피카소는 서구 전통에 반대하는 두 가지 부친 살해 행위를 결합했다. 즉 모순이 되는 원천들을 나란히 늘어놓아 그것들의 적절성과 역사적 중요성을 말소해 버렸으며, 동시에 다른 문화들을 차용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과 「아가씨들」은 둘 다 부친 살해라는 오이디푸스적 주제와 기민하게 연결돼 있지만, 피카소는 바라보기의 상황에 주로 공격을 가해 미메시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멀리 이끌어갔다.
재현의 위기
이제 스타인버그가 등장하기 이전에 공인된 관점, 즉 「아가씨들」이 '최초의' 입체주의 회화라는 가정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초기 입체주의를 입체에 대한 일종의 기하학적 양식화 작업으로 본다면 이 가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겠지만, 입체주의를 재현의 규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이해한다면 합당한 가정이다. 피카소는 이베리아 가면 같은 얼굴을 거트루드 스타인의 상반신에 접목시키고, 얼굴이라는 요소를 방대한 레퍼토리에서 차용할 수 있는 주어진 기호로 파악하여, 묘사의 환영주의적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피카소가 기호화 의미 작용에 대해 완전히 몰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가씨들」에서는 (아직 완전히 진척된 것은 아니지만) 기호는 이동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 작용은 맥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입체주의 전체가 실행한 작업일 것이고, 그렇다면 입체주의의 기원은 1908년 작품인 「세 여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피카소는 묘사의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회화의 모든 요소를 기호를 닮은 단일한 단위(삼각형)로 채우려 애썼다. 그러나 오른쪽 하단(여성과 관련된 미의 관념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가하는 장소)에 웅크리고 있는 아가씨의 얼굴을 위한 습작을 보면 얼굴이 토르소로 변형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피카소 스스로 자신이 창안하고 있는 기호 체제가 지닌 끝없는 은유의 가능성을 감지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무정형적 실험은 중단되고, 1912년 콜라주로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두 번째 실험을 수행하고 나서야 피카소는 기호학적 충동이 지닌 충만한 의미에 다다른다. 따라서 「아가씨들」은 하나의 외상적 사건이며 그 심층에 자리한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피카소 자신에게도 시간이 걸렸다. 즉 피카소는 입체주의의 모험을 전부 겪은 이후에야 자신이 이룬 성과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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