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1968년 반전운동과 그 밖의 정치적 시위를 경험하면서 연구에 변화를 겪었다. 당시 행정실을 점거한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소르본 대학 구내로 들어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중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투명하다고 여겨진 제도의 틀, 즉 학문적 지식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보증한다고 여겨졌던 틀을 푸코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렇게 대학의 독립성에 폭력이 가해지면서였다. 푸코는 그 틀이 권력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도적 틀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았던 대학을 하나의 틀로 인정하는 푸코의 전략, 대학이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음을 폭로하는 푸코의 전략은 미술계의 제도적 틀 안에서 작동하는 이해관계들을 폭로하고자 했던 미술가들에게 곧바로 채택됐다. 뷔랭, 브로타스, 하케 등이 그런 미술가들로 이들의 작업은 '제도 비판'이라 불렀다.
푸코가 학술 담론에 끼친 가장 심오한 영향은 역사 서술 방식을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지식의 형식들이 연속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들을 완전히 바꾸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들을 완전히 새롭게 조직하는 각각의 새로운 조건의 집합을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했다. 푸코가 구조주의자로 알려진 이유는, 상응하는 사실들의 연결 고리를 만들면서 지식을 배열하는 조직화 방식(혹은 발화의 형태)으로서 언어학적 기호를 중요하게 다루었기 떄문이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의 사유는 은유적으로 수행됐고 닮음으로 현상을 설명했는데, 뇌가 호두처럼 생겼기 때문에 호두는 정신병에 좋다는 식이다. 푸코는 이 닮음이 갑작스럽게 그가 '고전주의적'이라 부른 계몽주의 사유로 대체됐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유는 동일성과 차이를 관련짓는 격자식 체계를 통해 현상의 질서를 세웠다. 그다음에는 근대적(혹은 19세기의) 형식들이 들어섰는데, 푸코는 이 형식들을 제유라 불렀고 그 특징을 '유비(analogy)와 계기(succession)'로 보았다. 여기서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발생이 종적 분화를 대체한다. 고전주의적 체계화 방식은 공간적이지만, 이 새로운 에피스테메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이다. 따라서 자연주의자들의 논쟁은 생물학이나 진화론으로 부의 분석은 강제학(마르크스의 생산의 역사학)으로 기호의 논리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으로 넘어갔다. 시각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그리고 비가시적인 것)으로의 변환은 감옥에 대한 푸코의 연구인 「감시와 처벌」(1977)에서 특별히 강조된다. 그는 에피스테메의 질서들을 발굴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을 '고고학'이라 불렀고 이를 '역사'와 구별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는 단계적인 발생과 관련되는 것으로 19세기의 에피스테메로부터 나온 것이고, 따라서 인식의 낡은 형식이었다. 광범위한 연구서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성의 주체와 실천에 대해 근업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에서 정신분석학처럼 그것을 말하는 것을 장려하고 그 실천을 변형하는 상황으로 에피스테메가 전환하는 점에 주목했다.
▶관련글: 1971년 제도 비판 작업, 다니엘 뷔랭, 한스 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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