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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00년대 노트

1900년a 프로이트, 클림트, 에곤 실레

by 책방의 먼지 2019.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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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다.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표현적인 미술이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본능적 충동의 분투를 그려내고자 했다."라는 점에서 빈의 미술을 바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같은 대담한 혁신자들이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이 화가들 역시 20세기 초,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의 해방적 표현을 통해 지옥을 휘저어 놓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아시아 미술을 수집하는 보수적인 컬렉터였던 그는 모더니즘 미술가들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간 빈 출신의 이 네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발전시킨 "꿈-직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러운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 낸 토막 난 내러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그림과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미술은 다른 어떤 모더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오이디푸스적 반역

파리가 모더니즘 미술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지만 빈에서도 세기말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여럿 일어났다. 그중 하나는 바로 '분리' 행위 자체였다. 클림트를 비롯한 열아홉 명의 미술가와 건축가 그룹은 1897년 미술 아카데미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다. 보수적 아카데미 진영에 대항하는 분리파는 불어로는 아르 누보,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이라 불리는 국제적 양식을 수용하고 새로움과 젊은 활기를 지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던 때에 등장한 이런 새로운 미술은 역사학자 칼 E. 쇼르스케가 주장했듯이, 구체제에 존재하던 "자유로운 자아의 위기"의 징후적 표현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들 미술가와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이 더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이런 미술이 드러낸 것은 자아의 해방이 아니라, 아카데미와 국가(프로이트의 개념을 빌자면 우리 모두를 감시하는 초자아)라는, 위기에 처한 권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개별 주체 내부의 갈등, 즉 "집단적인 오이디푸스적 반역과 새로운 자아에 대한 나르시즘적 추구의 모호한 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문화의 위기"(쇼르스케)였기 때문이다. 

모순에 빠진 분리파는 양식적으로는 구상과 추상, 분위기상으로는 세기말적인 불안과 20세기 초의 삶의 기쁨 사이에서 갈등했고, 이런 갈등은 클림트를 계승한 실레와 코코슈카의 날카롭고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선 표현에서 드러나곤 했다. 

독일의 위대한 평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분리파의 아르 누보 양식에 내재한 이런 긴장이, 공계의 개인적인 기반과 공업적 생산의 집단적 기반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에서 야기된 것임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외로운 영혼을 형상으로 바꾸는 일은 (아르 누보의) 명백한 목표였다. 반 데 벨데에게 집은 개성의 표현이었다. 집의 장식은 회화의 서명과 같은 것이었다. 아르 누보의 진정한 중요성은 이데올로기로 표출되지 않았다. 아르 누보는 기술 진보에 의해 상아탑에 갇혀 버린 미술의 편에서 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것은 내면성의 모든 남아 있는 병력들을 동원하여, 선이라는 매개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기술로 무장한 환경에 대항하는 벌거벗은 식물성 자연의 상징인 꽃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무기력한 반항

빈 분리파의 첫 번째 주자는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적 문화에서 시작돼, 19세기 말 아방가르드의 반 전통적인 반항을 거쳐, 빈 상류사회의 장식적 초상으로 마감했다.

1894년 신설된 빈 대학에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는 계몽주의적인 주제로 철학.의학.법학을 나타내는 천정화 세 점을 클림트는 의뢰받았다. 10년간 이 작업에 매달린 클림트는 1900년에 첫 작품인 「철학」을 공개했는데 당시 분리파 활동에 몰두해 있었던 터라 그의 완성작은 대학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 그림에서는 마치 빛에 대해 어둠이 승리한 듯 보였다. 클림트가 이 작품을 통해 합리주의 철학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1901년에 공개된 다음 작품에서는 의학을 또 다른 지옥으로 표현해 조롱했다. 빈 대학에서는 더욱 모욕적인 이 작품을 거듭 거부했고 클림트는 이 처사를 비난했다. 그는 법학을 주제로 한 마지막 그림에서 형집행의 광경을 지옥으로 묘사하여 대학의 처사에 응수했다. 문어다리에 몸을 휘감긴 남자의 운명은 징벌을 내리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달려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여기서 형벌은 거세를 의미한다. 남자는 몹시 수척하고 머리를 숙였으며 성기는 문어의 입 근처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실레와 코코슈카가 이후 작품에서 해방시키려 했던 것은 이와 같은 위축된 남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미술에서 남성은 계속해서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쇼르스케는 "그의 반항 자체는 무기력이라는 정신으로 물들어 있다."는 말로 클림트를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레와 코코슈카에 대해서도 가능한 설명이다. 

이렇게 실패한 주문작들은 당시 공공미술이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중의 취향과 선진적인 회화가 확연하게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다음부터 클림트는 아방가르드에서 벗어나, 세련된 사교계 명사들의 사실주의적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장식적인 배경에 장식적 인물들을 그렸다. 그러자 "억압된 본능적 충동"을 탐구하는 일은 실레와 코코슈카의 몫이 됐고 이들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고뇌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법학 Jurisprudence」 1903~1907

징후적 초상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충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면 실레는 도착적인 쾌락에 대한 포로이트의 또 다른 개념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탐구했다. 거울이나 관람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등장하는 실레의 자화상에서는 그의 응시와 우리의 시선 간의 차이가 용해돼 서로 섞여 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람자, 스스로 내보인 모습을 은밀하게 엿보는 외로운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레는 자신의 이미지를 거만하게 자랑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로 인해 애처롭게 표현된 모습으로 나타냈다. 

프로이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미술가들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인물 묘사를 이어받은 일종의 징후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초상은 미술가의 욕망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림 속 모델에 내재된 억압을 몸의 경련과 긴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클림트와 실레의 여위고 수척한 듯한 선 표현과 코코슈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휘갈긴 듯 격앙된 선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주체의 갈등이 고통스럽게 표면화된 기호인 것이다. 

에곤 셀레 「입을 벌린 회색 누드 자화상 Nude Self-Portrait in Grey with Open Mouth」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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