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70년대 노트

1972-1973년 개념미술, 비디오 아트

by 책방의 먼지 2019. 7. 3.
반응형

 

▲ 1972b / 서독 카셀에서 열린 국제전 《도큐멘타 5》를 통해서 유럽이 개념미술을 제도적으로 수용했음을 알린다.

개념주의의 마주침

1972년은 유럽 개념미술에 있어 기적의 해였는데, 이 해에 베셔 부부, 브로타스, 뷔랭, 한네 다르보펜, 한스 하케, 팔레르모,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등장했고, 이 작품들이 제도적으로 수용되면서 절정을 맞았다. 

 

개념주의의 핵심은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이다.(변경, 처리 방식, 수량이 무한하다.)

 

이 세대 미술가들이 인정하고, 반응하려 했던 사실은 '흰색 입방체'의 공간과 벽에는 실제로 제도의 권력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네트워크가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고, 주체가 순수한 지각 행위 속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구성된다는 중립적인 현상학의 공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는 점이었다. 전통적으로 미학의 임무로 간주됐던 것들이 조용히 후퇴했기 때문에 이들 작품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급진성이 힘을 얻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1973 / 비디오 음악 무용을 위한 '키친 센터'가 뉴욕에 생긴다. 시각예술과 퍼포먼스 아트, 텔레비전과 영화 사이에서 비디오 아트가 제도적인 지위를 주장한다. 

 

1960년 미국 가정의 90퍼센트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었고, 텔레비전은 곧 대중문화의 주도적인 매체로 자리 잡았다. 이때 몇몇 예술가들은 이미 인디펜던트 그룹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텔레비전을 이미지의 원천으로 삼거나, 해프닝, 퍼포먼스, 설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조작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독일의 볼프 포스텔(Wolf Vostell, 1932~)과 한국의 백만준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텔레비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켰고 심지어 파괴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의 출몰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다른 가능성들을 실현하고 싶어했다. 그는 텔레비전을 수동적인 관람자를 위한 장치에서 비디오의 수신자가 송신자가 되기도 하는 창조적인 상호작용의 매체로 변형시키고자 했다.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이 수신자와 송신자 사이의 상호적인 매체로서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기업 자본주의의 전략뿐이다. 이런 이유로 텔레비전에 대한 비판은 몇 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비디오 아트는 기술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더 발전된 장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비디오 아트의 예술성이 결정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중요한 질문은 "비디오는 예술인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비디오를 예술로 만들 것인가, 혹은 최소한 어떤 방식으로 60년대와 70년대에 진행된 미적 영역을 변형하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순수한 현재의 불가능성

댄 그래이엄 "60년대 모더니즘 미술의 전제는 현재를 직접적인 것으로, 즉 역사적인 것이나 그 밖의 기존 의미들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현상학적 의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나의 시간 지연 비디오, 설치, 포퍼먼스 작업은 이 현상적인 직접성이라는 모더니즘의 관념을 사용해 관람자 자신의 지각 과정의 현전을 알아차리게 하는 동시에, 순수한 현재시제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이 직접성을 비판한다."

모더니즘의 직접성에 대한 이런 이중적 관계는 초기 비디오 아트가 다른 종류의 실천,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즘 실천들의 포문을 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초기 페미니즘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비디오를 이용하여 현상학적인 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지각을 탐구했다. 「왼쪽, 오른쪽」에서 조나스는 얼굴을 이등분하는 손거울이 달린 카메라 앞에 서 있다. 관람자는 거울에 반사돼 뒤집힌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어느 쪽이 왼쪽이고 오른쪽인지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조앤 조나스, 「왼쪽 오른쪽 Left Side, Right Side(부분)」, 1972년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