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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70년대 노트

1971년 제도 비판 작업, 다니엘 뷔랭, 한스 하케

by 책방의 먼지 2019.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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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한스 하케의 전시를 취소하고 제6회 《구겐하임 국제전》에 출품된 다니엘 뷔랭의 작품을 철거한다. 제도 비판 작업이 미니멀리즘 세대의 저항에 부딪힌다. 

1971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포스트미니멀리즘 세대 미술가와 관련된 두 건의 중대한 검열 사건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두 사건의 중심에는 미국 미술 제도에 반대하는 유럽 미술가들이 있었고 두 번째 사건에는 미국 미술가들도 몇 사람 관련돼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의 회고전 기획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당시 미술관장이던 토머스 메서는 전시에서 두 작품(「샤 폴스키와 그 밖의 여러 명의 맨해튼 부동산 소유관」(1971), 「솔 골드먼과 알렉스 디로렌조의 맨해튼 부동산 소유권」(1971))을 뺄 것을 주장했으나 미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에드워드 프라이가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결국 전시회 자체가 완전히 취소됐고 큐레이터는 해고됐다. 

메서는 이 작업들이 "미술 작품의 위대한 중립성을 더럽히고 따라서 미술관의 보호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미술 작품의 중립성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적, 저널리즘적인 실천에 대해 미술적, 미학적 실천이 무엇을 정의하는지에 관한 논쟁으로 나아갔다. 

 

미니멀리즘의 한계들

두 번째 검열은 이로부터 몇 달 후 제6회 구겐하임 국제전에서 발생했다. 뷔랭의 거대 현수막 모양의 작품을 철거하지 않으면 전시 참여한 다른 미술가들이 전시에서 빠지겠다고 버텼다. 

뷔랭의 작품 설치에 반대한 이유(다른 미술가들 자신들의 작품이 가려진다는 주장) 그 너머에는 두 세대 간의 대립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한쪽에는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다른 쪽에는 새롭게 떠오르는 개념주의의 대표자이자 제도 비판에 분명하게 초점을 맞춘 뷔랭이 있었다. 뷔랭을 노골적으로 공격한 저드와 플래빈은 뷔랭의 작업이 자신들의 작업이 지닌 여러 오류들을 폭로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첫째, 저드와 플래빈은 관람자와 작업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현상학적 공간을 중립적이라고 가정했지만, 뷔랭은 제도 공간에서는 순수하게 시각적이거나 현상학적인 경험이 있을 수 없음을 공식화하여 미니멀리스트들의 가정에 도전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정되는 제도의 이해관계는 미술 작품의 제작과 이해, 그리고 시각적 경험의 틀을 다시 짜고 재정의하기 때문이다.

둘째, 뷔랭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현수막 작업을 통해 미술관 건축과 조각 작품 사이의 대립을 드러냈다. 뷔랭은 자신의 작업으로 미술관 내부의 깔때기 모양 나선형 공간을 완전히 관통함으로써 프랭크로이드 라이트의 이 저명한 건축물에 도발적으로 맞섰다. 미술관 건물은 전통적으로 그 안에 설치되는 회화나 조각 작품에 대해 확실하게 통제력을 행사하는 융통성이 없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미술 작품들은 미술관이라는 건축 공간이 중립적일 것이라는 가정을 철석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다니엘 뷔랭, 「사진-기억: 회화-조각 Photo-souvenir: Peinture-Sculpture」 1971

 

억압적인 관용을 시험하기

당시 몇년에 걸쳐 하케와 뷔랭이 정식화한 제도 비판은 후기구조주의와 비판 이론이 시각적 실천에 미친 영향이라는 차원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하케의 제도 비판은 제도의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다루는 것으로 미학적인 것의 범위를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재맥락화하려는 시도이다. 「아스파라거스 다발」의 역사를 추적하는 열개의 패녈은 첫 번째 소유주인 샤를 에프뤼시를 거쳐 독일인 출판가이자 미술상인 파울 카시러와 유대계 독일인 화가 막스 리베르만으로 이어졌다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한 리베르만의 손녀에게서 작품을 구입한 압스로 귀착됐다. 압스의 정치적 배경에 초점을 맞춘 패널에서 하케는 그에게 나치 경력이 있음을 폭로하고 한 개인이 문화적 후원자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얼마나 쉽게 '세탁'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술관 경영진의 투표로 거부당했다.

하케의 기획이란, 광범위하고 다양한 억압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실천을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와 연결하고, 문화란 이름의 위장을 장소 특정적이고 제도 비판적인 작업의 초점으로 만든다는 점, 그리고 이런 하케의 기획은 제도 자체가 재통합하거나 재중립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뷔랭은 하케와 연대를 선언하는 행위의 일환으로 하케 작업에 대한 검열에 대응했다. 뷔랭은 허락을 받아 하케의 패널을 복제해 자신의 작업에 붙이고 미술관의 넓은 벽을 초록색과 흰색 줄무늬로 덮어 버렸다. 미술 작품이라는 틀에서 자율성과 안전 보장을 요구함으로써 스스로를 재맥락화한 뷔랭의 줄무늬는 제스퍼 존스 작품 「깃발」의 줄무늬와 충돌했다. 여기서 회화 내적 논리는 전시의 정치학이란 맥락뿐만 아니라 건축적 구조라는 더 큰 맥락 속에 갑작스럽게 용해돼 버린다. 전시 개장일이 되자 주최자에게 고민거리가 될 정도로 하케의 작품은 완벽하게 복원됐다. 미술관 당국은 곧 보복을 감행했는데 밤중에 하케의 복사물은 찢겨졌고, 그 결과 뷔랭의 설치 작업은 3중의 검열 행위, 즉 하케 작업에 대한 두 번의 검열과 뷔랭 작업에 대한 파괴 행위로 손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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