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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70년대 노트

1975년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미술가들

by 책방의 먼지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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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를 발표하자, 주디 시카고와 메리 켈리 같은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여성의 재현에 관해 다양한 입장을 전개한다.

 

페미니즘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주제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자극을 받은 여성들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미술을 변형하면서 페미니즘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의 중요한 미술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젠더 정체성과 성차의 기호학적 의미 등 페미니즘의 주제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아기에 독립된 페미니즘 미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미술은 민권운동의 노선을 따라 성장한 여성 운동과 관련지어 서술할 수 있다. 

60년대 진행된 첫 번째 국면에서 여성은 평등권을 위해 투쟁했고, 페미니즘 미술가는 추상과 같은 모더니즘 형식에 평등하게 접근하기 위해 투쟁했다. 60년대 말에 진행된 두 번째 국면은 더 급진적이었는데, 여성운동은 남성과 다른 여성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장했고, 자연과의 특별한 친화성, 독특한 문화의 역사와 신화, 본질적인 여성성을 옹호했다.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추상처럼 남성에 연결된 모더니즘 형식에서 벗어나 여성에 연결된 공예와 장식 같은 형식을 내세웠으며, 적극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70년대 중반에 진행된 세 번째 국면은 앞서 추구했던 평등과 분리에 회의적이었다. 여성운동은 가부장적 사회에 여성을 위치시키는 것을 여전히 비판했으나, 이런 질서가 쉽게 극복되지 못하리란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남성과 분리된 여성만의 유토피아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안에 심어진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의 재현'에서 '재현의 정치'로 이동함에 따라, 미술관의 누드에서부터 잡지 모델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이 지닌 욕망과 공포의 기호 또는 징후로 다루어졌고, 여성이라는 범주는 자연생물학이나 '본질적인' 존재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사회사 안에서 '구축된'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결국 페미니즘 미술이 다른 미술, 즉 이름 없는 여성에 의해 전개된 주변적 형식만큼이나 유명한 남성이 독식하는 특권적 형식과의 끝없는 대화 속에서 생산됐다. 따라서 페미니즘 미술은 모든 관람자와 모든 신체가 지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동일하리라는 미니멀리즘의 가정에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시각성에 대한 비판을 다룰 때도 언어는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며 투명하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개념미술의 가정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태도는 초기 신체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을 페미니즘 미술이 변형시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미술들은 종종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슬로건에 따라 개별화되고 정치화됐다. 

 

정전에 도전하기

페미니즘이 여성 신체의 권리를 주장할 때(예를 들면, 낙태할 권리),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의 이미지와 여성에 의한 이미지를 복권하기 위해 애썼다. 이로 인해 장식미술이나 실용 공예처럼 역사적으로 여성의 젠더로 인식되고 저평가된 형식들이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샤피로는 콜라주를 페미니즘적으로 변형시킨 '페마주(femmage)'에서 다양한 바느질 기술을 이용했고,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 1930~)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을 다룬 「이야기 퀼트」에서 콜라주를 변형시켰다.

페이스 링골드 「할렘의 메아리 Echoes of Harlem」 1980

 

시카고는 도예와 바느질을 사용해 역사와 전설 속 여성들에 대한 기념비적인 '페마주'인 「디너 파티」(1974~19179)를 만들었다. 시카고의 이와 같은 "내 미술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추상 형태가 꽃과 음부의 이미지로 변형된 「위대한 여인들」이라는 회화 연작과 함께 시작돼, 「디너 파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역사 전반에 걸쳐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을 정돈해 온 여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최후의 만찬'은 여성을 '귀빈'의 자리에 놓았다. 첫 번째 식탁은 고대 선사시대 모계사회의 여성을 찬양하며, 두 번째 식탁은 기독교 태동기에서 종교개혁까지의 여성을, 세 번째 식탁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여성을 찬미한다. 시카고의 말에 따르면 「디너 파티」는 "우리를 서구 문명의 여행으로 인도하는데, 이 여행은 우리가 주요 이정표라고 배워 온 것들을 그냥 건너뛰는 여행"이다. 정전에 대한 이런 도전은 페미니즘 미술사학자들도 제기한 문제였다. 

주디 시카고 「디너 파티」 1974~9

 

새로운 욕망의 언어

「디너 파티」는 미국 페미니즘 미술의 두 번째 국면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여성을 연상시키는 미술과 공예를 재평가하고 페미니즘 역사의 잃어버린 인물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여성적 관점의 문화사를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신체를 축제를 통해 연결시켰다.

 

낸시 스페로 「아르토 사본 Codex Artaud VI 」(부분) 1971

이 시기에 다른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보다 고뇌에 찬 모습의 여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긴 두루마리 작업 「아르토 사본」에서 낸시 스페로(Nancy Spero, 1926~)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잔혹극'의 창시자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의 폭력적인 진술들을 "내가 그렸던 이미지들, 잘려 나간 머리, 남성이나 여성이나 양성의 뻣뻣한 형상에 돋아난 발칙한 남근 같은 혀, 구속복을 입은 희생자, 신화와 연금술에서 참조한 것들 등등"과 섞었다. 애나 멘디에타는 70년대 연작 「실루에타」에서 자신의 모습을 여러 풍경 속에 삽입해 여성 신체와 모성적 자연을 연결시켰다. 따라서 두 번째 국면을 지배한 것은 여성과 신체의 동일시,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였다.

이런 동일시는 여성을 자연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페미니즘이 사회 안에 여성을 다시 위치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본질주의적인'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대중문화의 상투적인 성차별에 맞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미술 안에 여성을 재현하지 않을 것을 주장한 반면,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욕망과 성차의 붕괴를 드러낼 다른 방법들을 모색했다. 이런 탐구는 북아메리카보다는 영국에서 더욱 진전됐다. 영국의 페미니즘은 북아메리카의 페미니즘보다 사회주의 정치와 정신분석학 이론에 더 가까웠다. 사실 영국의 페미니즘 논쟁은 프로이트, 자크 라캉, 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이와 미셸 몽트를레 같은 프랑스 페미니즘 분석가들이 이끌었다. 물론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에게 여성성은 수동성을 뜻하며, 라캉에게는 '거세'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처음에 영국에서 다음엔 다른 곳에서도 여성의 위치에 관한 비판적인 통찰을 페미니스트에게 제공했다. 이때 여성의 위치란 무의식과 상징적 질서 안에서의 위치, 고급미술 안에서의 위치, 일상생활 안에서의 위치를 모두 아우른다.  

정신분석학을 사용해 문화 비판의 용도로 개척한 페미니즘 논문은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로라 멀비(Laura Mulvey, 1941~)가 쓴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1975)였다. 멀비는 세 번째 국면을 맞은 페미니즘 미술의 주된 관심사를 뚜렷이 제시했다. 그것은 대중문화(멀비의 경우엔 고전 헐리우드 영화) 안에 여성을 구축하는 일과 정신분석학 안에 여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메리 켈리 「산후 기록: 자료 VI, 미리쓴 알파벳, 각명과 일기 Post-Partum:Document VI, Pre-Writing Alphabet, Exergue and Diary」(부분) 1978

메리 켈리는 1973~1979년에 「산후 기록」의 첫 번째 부분을 거의 마무리했다. 이 작품은 「디너 파티」와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졌는데 페미니즘의 세 번째 국면을 대표한다. 여기서 켈리는 정신분석학적 사례 연구와 민족지학적 현지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미술 프로젝트의 모델을 발전시켰다. 전체 135개를 포함해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산후 기록」은 다양한 종류의 이미지와 글을 두 개의 서사 안에 섞어 놓는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는 켈리의 아들이 가족, 언어, 학교,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제도들에 의해 아이를 '상실'해 가는 켈리의 반응을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켈리는 "여성의 물신숭배의 가능성", 특히 어머니의 물신숭배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프로이트에게 물신이란 잃어버린 것으로 드러난 성애적 대상을 위한 하나의 대체물이다. 성장한 아이는 어머니에게 잃어버린 것인데, 켈리는 이 상실에 초점을 맞춰 아이가 남긴 것들, 기저귀, 유아복, 처음 휘갈긴 낙서, 처음 쓴 글자 등을 어머니의 물신, "(어머니의) 욕망의 표식"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켈리는 이런 흔적 옆에 일화나 이론적 내용을 담은 메모를 놓았다. 이 메모들은 아이와 어머니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을 반박하기도 하고 확증하기도 한다. 이 작업의 결과물은 하나의 "일상생활의 고고학", 즉 젖을 떼고, 말을 시작하고, 학교에 다니고, 글을 쓰는 등의 일상생활이며, 또한 "여성을 위한 상징적 질서의 어려움"을 다루는 하나의 서사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미술은 현대미술을 변형시켰다. 이것은 켈리가 주장한 것처럼 "신체의 현상학적 현전을 성적 차이의 이미지로 변형함으로써, 대상에 관한 질문을 확장해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주체의 조건을 포함함으로써, 정치적 의지를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제도 비판을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옮김으로써"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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