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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책 속 상자

[이론] 이국적인 것과 나이브한 것

by 책방의 먼지 2019.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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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주의가 근대 유럽의 첫 번째 이국주의는 아니다. 18세기에는 시느와즈르(Chinoiserie, 중국 취미)으로, 그 다음엔 일본(지포니즘)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이런 이국에 대한 매혹은 대개 역사적 정복(나폴레옹의 1798년 이집트 출정과 1853년 강제적인 일본의 문호개방)과 제국주의적 행보(프랑스의 미술가들은 주 프랑스의 식민지로, 독일 미술가들은 독일 식민지로 향했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장소들은 "상상의 지리학"(1978년 출간된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의 용어)을 구성했다. 즉 그것은 심리적으로 이중적 감정과 정치적 야심이 투사된 공간-시간 지도였다. 이렇게 오리엔탈리즘 미술은 대개의 경우 중동을 문명의 요람이자 제국의 지배를 필요로 하는 낡아빠지고 부패하고 여성적인 곳으로 그렸다. 일본은 고대의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여겨졌으며 일본 미술 애호가들은 일본의 과거를 순수한 것으로 보았다. 일본 판화나 부채, 병풍에는 서양 미술의 재현 관례에서 벗어난 순수한 시각이 포함돼 있다고 여겨졌다. 원시주의는 더욱 원초적인 기원을 꿈꾸었지만, 여기서 원시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목가적인 것 또는 오세아니아의 열대 같은 감각적인 지상낙원에 사는 고결한 야생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같은 곳에 사는, 성적인 흑심에 사로잡히고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양분됐다.

아방가르드들은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 이 상상의 지리학에 매력을 느꼈다. 피카소가 시사했듯이 인상주의자들과 후기인상주의자들이 이미 일본을 점령해 버렸기 때문에 마티스와 파울 클레 같은 세대들은 일본 대신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오세아니아, 멕시코, 태평양 북서부로 관심을 돌렸다. 전략적으로 전통을 벗어나려는 경향은 민속 미술에 대한 관심에서도 나타난다. 고갱과 브르타뉴의 십자가, 비실리 칸딘스키와 바이에른의 유리회화, 카지마르 말레비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비잔틴 성상화가 그런 예이다.

 

특별한 경우로 '나이브' 미술가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찬양을 들 수 있다. 본업인 세관원이란 뜻의 '두아니에'로 불린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같은 미술가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이브 미술은 아동, 부족, 민속 미술처럼 교육받지 않은 직관적인 미술을 말했다. 그러나 루소는 파리 사람이지 농부가 아니었고 아카데미 미술을 잊기는커녕, 살롱 구성법에 근거를 둔 사실주의적 재현을 시도했다. 단순히 기법적으로 서툴렀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다른 아방가르드 동년배들보다 더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기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루소는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기 위해 초상화 모델들의 얼굴 치수를 재서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했으나 결과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초현실적인 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강렬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정글 그림' 연작에서는 화초의 줄기와 잎의 윤곽선을 꼼꼼하게 묘사하여 화면 전체를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하나의 불가사의하고 살아 있는 숲을 만들었다. 그의 모더니즘 미술가 친구들은 루소가 매우 진지했다고 했는데, 피카소도 그중 하나였다. 진지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전술적이고 일시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자 피에르 부리디외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미술가는 한 가지 점에서 '부르주아'와 일치했는데, 순진함을 '허세'보다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통 사람들'의 근본적인 장점은 그들에게는 '프티부르주아'를 부추기는 예술(혹은 권력)에 대한 '허세'가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암묵적으로 부르주아의 독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허를 찌르는 이중부정 전략을 통해 '대중적인' 취향과 견해로 돌아간다는 미술가와 지식인의 신화에서는 '사람들'은 쇠락하고 있는 귀족계급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한 소작인의 역할과 다르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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