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영어권 국가에서 프랑스의 선진 회화의 가장 열성적 지지자는 영국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Roger Fryy, 1866~1934)였다. 그의 기획으로 1910년 그래프턴 갤러리에서 열린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전》은 회의적인 런던의 대중들에게 세잔, 반 고흐, 고갱, 쇠라 등의 작품을 소개한 최초의 전시였으며 여기서 '후기인상주의'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1912년에 그는 재차 그래프턴 갤러리에서 제2회 《후기인상주의》전을 개최했다.
프라이가 핵심 멤버로 속해있던 블룸즈버리 그룹은 20세기 초 런던의 예술가들이 유동적으로 참여했던 집단으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부부, 그녀의 언니이자 화가였던 버네사 벨과 연인인 덩컨 그랜트, 작가 제임스와 리턴 스트레이치 형제, 그리고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참여했다.
프라이의 예술지상주의와 프랑스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열정은 감각과 의식의 정밀한 분석에 헌신하는 삶이라는 이 그룹의 모델 일부를 구성했다. 시인 스티븐 스펜더가 묘사한 대로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 되려면,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동시에, 불가지론자이거나,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자유당원이어서는 안 된다." 1938년 케인스는 「나의 초기 신념들」이라는 글에서 이 그룹의 감수성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문제가 된 것은 사람들의 정신상태, 특히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였다. 정신 상태가 행위나 성취 혹은 결과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대개 '이전'에도 '이후'에도 속하지 않는 무한하고 열정적인 명상과 교감의 상태로 이뤄졌다. 그 정신 상태의 가치는 유기적 통일성의 원칙에 따라, 부분으로는 제대로 분석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사건에 의존한다."
케인스는 그런 정신상태의 예로 사랑을 들었다.
"사랑을 받는 자와 미와 진리는 열정적인 명상과 교감의 적절한 주제였고, 사랑과 미적 경험의 창출과 향유, 그리고 지식의 추구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였다."
케인스는 "그 정신 상태의 가치는 유기적 통일성의 원칙에 따라 부분으로는 제대로 분석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사건에 의존"하며, "대개 '이전'에도 '이후'에도 속하지 않는 무한하고 열정적인 명상과 교감의 상태"라고 블룸즈버리 그룹의 특성을 규정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33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퀸스 홀에서 있었던 프라이의 강연과 청중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가 그림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조형성'이란 단어를 중얼거리기만 하면 마법에 걸린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가 회개 중인 종교인처럼 "슬라이드!"라고 외치면 스크린에 램브란트, 샤르댕, 푸생, 세잔 등의 그림이 흑백으로 나타났다. 그의 긴 지시봉은 예민한 곤충의 더듬이처럼 흔들리면서, "리듬감 있는 부분"이나 일련의 장면 위로 내려앉거나 때로는 대각선 방향으로 횡단했다. 이어서 청중들은 "그의 공단 양복 아래서 남수정과 황수정처럼 번득이는 강연 원고가 하얐고 창백하게 빛나는 것"을 경험했다. 안개를 뚫고 빛을 발하는 스크린의 흑백 슬라이드들은 마치 실제 캔버스와 동일한 결과 질감을 가진 듯했다.
그는 그 순간을 자신도 처음 접하는 경험인 양 만들었는데 매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관중을 사로잡는 비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감각이 떠오르고 형성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프라이는 지각의 바로 그 순간을 노출시킬 줄 알았다. 푸생, 샤르댕, 램브란트, 세잔, 이렇게 명멸하는 슬라이드 사이로 나름의 리듬을 가진 정신적 리얼리티의 세계가 나타났다. 퀸스 홀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모든 것은 연결됐고 하나의 전체가 됐다."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과 그것에 뒤따르는 '조형성'이라는 특징을 지각할 때 비로소 미적 경험이 소통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프라이는 작품을 설명할 때도 작품의 형식적 특징에만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그의 글쓰기에는 '형식주의'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프라이가 지각의 직접성을 추구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울프는 그림 감상에 대해 프라이가 한 말을 이렇게 상술했다. "나는 오후 내내 루브르 미술관에 있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관념과 이론을 떨쳐내려 했다...... 그렇게 해야만 발견이 가능하다...... 모든 작품에 대한 경험은 새롭고도 명명되지 않은 것임이 틀림없다." 프라이를 사로잡고 있던 이와 같은 "새롭고도 명명되지 않은 경험"은 「시각과 디자인」(1920)과 「변형」(1926)에 수록된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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