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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80년대 노트

1984년a 사진의 방향전환

by 책방의 먼지 201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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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터 버긴이 「현전의 부재: 개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제목의 강연을 한다. 이 강연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고, 또 앨런 세큘러와 마사 로즐러의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영미에서 전개됐던 사진 개념주의와 사진의 역사, 사진 이론에 관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분석 명제와 언어적 규정에 관심을 갖는 개념미술은 시각적으로는 사진 이미지를 분석적으로 다루려는 경향과 관련돼 있었다. 포스트미니멀리즘 미술이 언어나 신체의 지각에서 수행성(performativity)의 기록으로 옮겨 갔다면, 그 과정에서 사진은 지표성(indexicality)을 기반으로 시간적, 공간적 차원을 기록하는 매체 역할을 했다. 따라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주제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작 과정과 특정 장소들, 그리고 우연성과 맥락성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사진은 미세한 시공간적 변화, 점증하거나 연속해서 일어나는 행위의 작은 변화를 기록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개념주의에서 점점 중요하게 다뤄지던 의미 작용의 과정과 생산 자체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 주는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영국의 미술가 빅터 버긴(Victor Burgin, 1941~)은 "미술의 가장 적절한 기능은 세계를 향한 태도의 제도화된 양상들을 바꿈으로써 사회화의 담지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미술 활동도 그것이 속해 있는 사회의 코드와 실천에서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실행되고 있는 미술은 이데올로기 바깥에 놓여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내용적으로 단순한 미술 이상의 미술을 생산해야 할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개념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 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미국형 형식주의의 마법은 놀랄 만큼 오랜 기간 영국 미술가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 형식주의 모더니즘은 《스크린》의 편집자들이 소개한 두개의 이론적 성과들 ㅡ하나는 러시아 소비에트의 형식주의적 사유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구조주의 기호학과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학ㅡ이 조명되면서 빠르게 해체됐다. 그 영향으로 버긴은 모더니즘과 개념주의와 맺고 있던 관계를 청산하게 되고, 바로 이것이 1984년에 그가 발표한 논문 「현전의 부재」의 주된 내용이다. 

 

사진의 방향 전환

특별히 사진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 최초의 인물 중 하나는 에드 루샤이다. 에드 루샤의 사진들은 아마추어적이고 대중적이라 할 만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 이미지의 탈숙련화라는 원리와 결부돼 있었다. 60년대 중반에는 댄 그레이엄의 시원적 개념주의 사진이란 또 다른 사진의 유형이 나타났다. 지역 고유의 건축 이미지를 보여 주는 그레이엄의 작업은 30~40년대 사진에서 보이는 질적인 완성도와는 일종의 거리 두기를 수행한다. 그는 이미지로서의 지방 고유의 건축이라는 관념에 지역적이고 대중적인 사진 작업이라는 관념을 추가함으로써 원래 루샤의 기획이었던 사진 제작의 탈숙련화를 더욱 심화시킨다. 

  ▷관련글:1968년b 개념미술, 세스 시겔롭, 로버트 모리스, 댄 그레이엄, 조지프 코수스

개념미술의 맥락으로 들어오면서 사진은 그레이엄이 성취한 것 이상의 수많은 기능을 맡게 됐다. 첫 번째로 무엇보다 사진은 미술 작품의 배포 형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유일무이한 대상으로서의 미술 작품이란 관념을 해체하는데 기여했다. 일찍이 워홀이 유일무이한 원본으로서의 회화에 약간의 흠집을 내기는 했어도, 결국 그는 다시 그 조건으로 돌아갔다. 루샤에게서 최종 생산물은 실제로 대중에게 배포될 수 있는 다양한 대상, 즉 값 싸게 만든 책이었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아우라'를 그대로 남겨 둔 팝아트 회화와는 명백히 대립됐다. 두 번째로 사진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다양한 영역의 주제를 도입함으로써 시원적 개념주의와 개념주의의 맥락으로 진입했다. 루샤는 건축, 지역 도시 공간, 교통 문제 같은 도시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미술 작업의 영역에 다시 등장시켰다. 모더니즘이 전성기에 이른 30년대까지는 건축과 도시성에 대한 주제가 아방가르드의 고려 사항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도시의 공적인 공간 조건과 관련된 모든 주제들이 자취를 감췄다. 루샤의 작업 이후 개념주의 미술가들의 작업에 와서야 비로소 공적 도시 공간, 건축, '공공성'에 대한 문제들이 다시 아방가르드 주제가 됐다.

 

지표에서 정보로

그러나 60년대 후반이 되자 개념미술가들의 사진 작업 방식에 맞서는 미술가들이 대거 등장해, 개념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정립했다. 그들이 사용한 유산은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전통이었다. 앨런 캐프로, 존 발데사리, 시인 데이비드 앤틴과 함께 수학한 그룹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 미술가들은 개념미술의 허울뿐인 중립성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 역사적인 전환을 잘 보여 주는 예는 루샤의 작품집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 프레드 로니디어의 「29건의 체포」이다. 그는 개념주의가 거부했던 정치적, 맥락적, 역사적 요인들을 새삼스레 도입함으로써 루샤의 허울뿐인 중립성을 비판한다. 

 

프레드 로니디어 「29건의 체포 29 Arrests」(위) 」 「#10: 해군11지구 본부」(아래) 1972년 5월 4일 샌디에이고

 

반복적 연속성과 담지자 사이에서

로즐러와 세큘러는 사진 작업이 어느 정도까지 행동주의적, 개입주의적, 선동적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잇는지, 또 사진이 사진으로서 어느 정도까지 그것의 정치적 유효성을 막는 담론적 관례와 제도적 구조에 포함되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이것은 사진가들이 글을 쓰고 미술 작업을 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 가운데 하나이다. 즉 한편으로는 사진이 무엇인지('지표적 기호'로서의 위상), 그것이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며 제도적, 담론적으로 어떤 위치를 갖고 배포되는지에 대한 기호론적 반성은 정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돌아가자는 순진한 주장과 거리를 두는 이와 같은 작업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정반대로, 이런 반성은 그 과정에서 맥락화나 역사적 특정성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순수한 기호론적 비판을 넘어선다. 따라서 미국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유효성에 대한 순진한 전제를 비판하는 것이 개념주의 사진의 순수한 중립성을 비판하는 것과 하나로 합쳐진다고 할 수 있다. 

마사 로즐러의 「두 개의 부적절한 묘사 체계로 본 바워리 가」는 이런 관점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프로젝트이다. 이 작업은 입자가 굵은 흑백 영상을 통해 보다 질 낮은 형태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70년대가 이런 유형의 작업에 부여한 사진의 역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70년대 뉴욕근대 미술관의 존 자코우스키가 추켜세웠던 뉴욕 거리 사진이라는 특정 유형의 작업에 대해 비판한다. 워커 에번스의 전통으로 돌아간 로즐러는 자신이 "사진적 재현의 부적절성"이라고 부른 것에 자기 위치를 정한다. 동시에 그녀는 언어적 체계가 술주정뱅이를 재현하는 데 부적절함을 명백히 드러낸다. 마주 보는 면에 술에 취해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의 목록이 사진 이미지와 병치되어 제시된다. 가장 저속한 속어와 가장 구식의 표현부터 문어적인 표현에 이르는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목록은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인 연속성처럼 보이지만, 그 주체와 언어적 위상을 통해 언어의 순수한 자기 반영성에 대한 개념미술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한다. 언어를 다시 신체적인 것의 영역, 즉 무질서, 일탈, 사회적 자격 상실의 영역과 연결시킴으로써 개념미술이라는 합리적인 프로젝트 속으로 대항-합리성의 차원을 도입한다. 

 

마사 로즐러 「두 개의 부적절한 묘사 체계로 본 바워리 가」 197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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