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를 발표한다. 이로써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미술과 건축을 넘어 문화정치학으로 확장되고, 두 개의 상반되는 입장으로 나뉘게 된다.
전후 비평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념만큼 논쟁적인 용어는 없었다. 이 용어는 '모더니즘(modernism)', '근대성(modernity)', '근대화(modernization)' 등의 역시 파악하기 어려운 용어들과의 관계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언하는 방식인 동시에 그것을 재발견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과의 단절이기보다는 과거의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이른바 '소비 자본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와 관련된 문화의 새로운 계기로서, '하나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독특한 것이었다. 제임슨에게 포스트모던 문화와 연관된 스펙터클한 이미지들, 즉 잡지와 영화 그리고 TV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허상들(시뮬라크라)은 소비주의의 욕망에 의해 추동된 경제의 '문화적 논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저자인 리오타르에게 포스트모던은 근대성의 모든 거대 서사가 끝이 났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두 논쟁에서 서로의 결론은 다르지만 두 적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동력은 여전히 이윤을 위해 생산과 소비, 교통과 통신의 양식들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근대화'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런 이유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시기 구분은 '모더니즘'이란 예술 형식, 심지어 문화적으로 '근대성'이란 시대의 종말을 가리키는 것일 수는 있을지언정, '근대화'라 불리는 사회 경제적인 과정의 종말이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두 개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이 이론에 대한 논쟁이 한창일 때 당시, 1984년 미국은 가족, 종교, 국가라는 본래적 가치, 즉 문화적 전통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던 정치적 신보수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는 그런 기원과 회귀 모두에 의문을 던졌던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신보수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단순히 겉모습으로 환원해, 건축-유리와 강철의 국제 양식, 미술-추상회화, 소설-언어학적실험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건축에서는 장식으로, 미술은 형상, 소설은 서사로 돌아감으로써 모더니즘에 대항했다. 즉 대중문화 특유의 익명성에 반대해 미술가 개인을 그리고 모더니즘 문화 특유의 기억 상실에 반대해 역사적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 양식을 인용할 때조차, 흔히 '혼성모방'이라 불리는 인용된 이미지들의 혼합을 통해 원래 맥락뿐만 아니라 의미까지도 제거해 버려 역사를 파괴하는 중대한 모순에 놓인다. 80년대는 양식의 복귀가 아닌 혼성모방을 통하 한 그것의 붕괴로서 역사의식의 복원이 아닌 소비주의의 기억 상실을 통한 침식으로서, 그리고 천재로서의 미술가의 재탄생이 아닌 모든 의미의 유일무이한 기원으로 이해됐던 "작가의 죽음'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미술가의 독창성과 전통의 권위 모두를 의문시했으며, 재현의 비판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재현은 현실을 모사하기보다는 그것을 구성해 내고, 진실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여러 스테레오 타입에 종속시킨다고 논의됐다. 모더니즘은 이미 미술관의 공식 미술, 기업이 선호하는 건축 양식이 돼 있었기 때문에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는 모더니즘이 충분히 비판적이지 않기에 극복돼야만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단일한 '작품'이란 모더니즘 모델에 맞서기 위해 파편화된 '텍스트'란 개념을 후기구조주의로부터 빌려왔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작품'은 유일무이하여 완벽한 형식을 지닌 일종의 상징적 전체로서 이해됐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는 전혀 다른 종류로서, 바르트에 따르면 "그 어느 것도 독창적이지 않은 다양한 글쓰기들이 한데 섞이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이었다. '텍스트성'이란 개념은 차용된 이미지, 그리고 익명적인 글쓰기라는 전략에 잘 들어맞는 듯 보인다. 셰리 레빈 초기의 베끼기 작업들과 루이즈 롤러의 사진 배치 작업들뿐만 아니라, 바바라 크루거의 초기 사진-텍스트들과 제니 홀저(Jenny Holzer, 1950~)의 포스터-발언 작업들에서 이 전략이 사용됐다. 이 텍스트성이 겨냥한 것은 거장의 작품과 거장 미술가란 모더니즘의 관념이었고, 이것들은 폭로돼야 할 이데올로기적인 시화로서 탈신화화되거나 해체돼야 했다. 이런 신화들은 다분히 남성적인 것이었기에, 이와 같은 비판을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주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혼성모방과 텍스트성
미술 제작의 모델로서 모더니즘의 '작품'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는 상당히 다르다. 혼성모방 작업(예를 들어 줄리앙 슈나벨의 신표현주의 회화)과 텍스트성 작업(예를 들어 로리 앤더슨의 복합 매체 퍼포먼스) 사이에 놓여 있는 양식적이고 정치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안정적인 주체성이란 관념을 뒤흔들고 전통적인 재현 개념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혼성모방과 텍스트성은 리오타르에게는 '포스트모던 조건'을 구성하는 주체성과 내러티브가 처한 동일한 위기, 그리고 제임슨에게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를 알려 주는 파편화와 방향 상실이라는 동일한 과정에 대한 상보적인 징후로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에 처하게 된 그 주체성과 내러티브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모더니즘에서 그것들은 일반적인 것, 심지어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전제됐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조건'의 비평가들은 곧 이 주체성과 내러티브를 보다 특수한 것, 즉 주로 백인, 중산층, 남성, 서유럽인, 북아메리카인들에 한정된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주체성과 내러티브 그리고 근대의 위대한 전통에 대한 이런 모든 위협은 어떤 이들에게는 실제로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미술, 역사, 규범, 서구의 종말에 대한 애도와 부정의 반응을 동시에 유발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특히 성적, 인종적 그리고/또는 문화적 '타자'로 불리는 이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현실적인 상실이 아니라, 모든 다른 종류의 주체성과 내러티브에 대한 잠재적인 개방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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