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 비스바덴에서 조지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 운동의 형성을 알리는 일련의 국제적 행사를 기획한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가장 복잡하고 그로 인해 전반적으로 저평가된 예술 운동으로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과 대립하면서 나란히 전개됐다.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축주의 이후의 다른 어떤 아방가르드나 네오아방가르드와 비교할 때 훨씬 개방적이며 국제적인 활동을 벌인 플럭서스는 예술과 삶을 구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도 예술적인 사건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럭서스는 '플러스' 콘서트와 페스티벌, 음악적인 퍼포먼스와 연극적인 퍼포먼스, 혁신적으로 디자인된 출판물과 선언문, 메일 아트, 일시적인 행사, 제스처, 행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관객 참여의 강조, 언어적 수행으로의 선회, 그리고 제도 비평의 시작과 같은 개념 미술의 여러 주요 양상을 창시했다.
플럭서스 운동은 전후 예술가들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패권을 장악한 미술계 상황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결정적 순간에 일어났다.
복합적인 국제주의와 그룹 작업의 강조 외에도 플럭서스는 처음부터 정체성과 예술적인 작가성이라는 관습적인 개념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플럭서스는 페미니즘을 노골적으로 표방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남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생산주의가 미학적인 자기 성찰을 실용주의적 생산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문화적 텍스트와 오브제의 엘리트주의적 유통 양상을 변화시킴으로써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요구에 응답할 필요성을 주장했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다다이즘은 고급예술의 제도화 및 일상과의 분리에 대해 논박하면서 전시와 오락이 통속적인 대중문화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단정했다. 따라서 플럭서스는 언어학적인 생산과 시각적인 생산, 즉 텍스트와 오브제의 전통적인 경계를 없애는 데 착수했다.
숭고화와 탈숭고화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적 장르와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중심적 역할을 융해시킴으로써 팝아트 고유의 전통 고수주의자와 맹목적인 구체화의 미학에 대해 변증법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플럭서스는 "사물"을 의식적으로 "행해진" 일상적 활동의 흐름 속에 재통합시키는 공공연한 행위를 통해, 외상이나 억압에 의해 주체로부터 분리됐거나 아니면 일반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단순히 "잃어버린" 사물과의 관계와 그 경험의 수용 능력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발견과 유사한 예술적 상응물을 제공했다.
이런 숭고화와 탈숭고화의 변증법은 플럭서스가 최초의 퍼포먼스 때부터 관객에게 보여 준 난해함의 핵심이자 중복 결정이다.
급진성의 변증법
이론과 실제의 모순은 플럭서스 프로젝트의 특징이었다. 플럭서스는 예술 작품의 사물성과 상품성에 단호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최저가의 싸구려 사품을 제작했다. 또한 지정학적 경계와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적 사물의 보편적인 접근성을 주장하면서도 20세기의 가장 접근하기 어렵고 난해한 문화 운동 가운데 하나가 됐다.
플럭서스는 예술적 대상과 일상적인 사물 사이의 경험적 차이를 성공적으로 일소했다고 주장했지만 문화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산과 경험의 조건이 급격하게 변화됐음을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했다. 플럭서스가 우연적인 이벤트와 일시적인 오브제를 미학적 표준으로 만든 것은 탈분화와 탈숭고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사회 전체의 흐름에 무지한 단체가 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 빈에서 귄터 브루스, 오토 뮐, 그리고 헤르만 니치 등 일군의 예술가들이 모여 빈 행동주의를 결성한다.
제의로서 회화에 가하는 신성모독
과격한 파괴는 아니었지만 이젤화와 전통적인 형식과 재료, 과정들을 탈피하고자 했던 첫 번째 단계는 1960년 무렵 귄터 브루스(Günter Brus, 1938~), 오토 뮐(Otto Muehl, 1925~2013),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 1938~)와 같은 빈의 예술가들로부터 비롯됐다. 그때부터 회화는 브루스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아이가 마구 칠해 놓은 것처럼 퇴행하거나, 니치가 행한 물감 쏟기 작업처럼 행위의 우연적 과정을 거치고, 혹은 회화의 지지체인 캔버스를 찢거나 오려 내어 그 표면을 손상시키거가 뮐처럼 부조에서 오브제로 변화해 갔다. 이는 캔버스 그 자체가 여러 평면 가운데 하나, 즉 다른 오브제들을 담고 있는 오브제에 불과한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빈 행동주의 미술가들은 두 번째 단계로 원근법적 질서가 가진 중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비 구성성'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사회적이라기보다 연극적이라 할 수 있는 공공의 영역으로 회화를 확장시켰다.
미국 예술가 캐프로, 다인, 올덴버그의 초기 '해프닝'과 1962년 시작된 빈 행동주의자들의 퍼포먼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미국 작가들의 '해프닝'이 신체와 테크놀로지, 기계적인 것과 대중문화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주목한다면, 빈 행동주의 미술가들은 처음부터 곧바로 제의와 연극성으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이런 차이점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빈 행동주의자들은 액션 페인팅과 타스즘을 지역적 특색이 드러나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전통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빈 문화가 지니는 근본적인 특징은 가톨릭 신앙과 가부장제가 권력적이고 위계적인 제왕적 질서와 뒤섞여 있다는 데 있다. 이런 혼합성은 부르주아 계급 속에 뿌리 깊게 내면화돼 존속해 왔다. 20세기 초부터 빈의 표현주의는 이런 권력 구조에 반대해 왔고, 그 자체로 첨예하게 지속돼 온 변증법 속에서 그룹을 이끌어 왔다.
두 번째 이유는 빈 행동주의자들이 정신분석이라는 문화 전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세웠던 이론을 재발견한다거나, 빌헬름 라이히부터 카를 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는 이론들 속에서 정신분석을 재규정하려는 노력들이 분명 빈 행동주의를 정의하는 또 다른 요소이다.
빈 행동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활동과 작업을 정확히 후기 파시즘이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사회역사적 맥락 안에 놓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작업이 관람자들을 대면하는 방식으로서의 비정상적 폭력성은 유럽의 후기 파시즘적 문화에 내재하는 독특한 변증법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 대한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형태의 모욕을 주는 제의 행위와 연극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모독하는 것, 모든 문화적 표현이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차원에서 이뤄져 왔던 인간 주체의 파괴에 대항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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