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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60년대 노트

1960년 그린버그, 리히텐슈타인

by 책방의 먼지 2019.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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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파리의 다양한 미술가를 모아 누보 레알리즘 그룹을 결성한다. 이 그룹은 콜라주, 레디메이드, 모노크롬의 패러다임을 재정의한다. 

 

미술이 대중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름 아래 활동하는 미술가 그룹이 조직돼야 한다고 생각한 프랑스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1960년 10월 27일 파리 이브 클랭의 아파트에 모인 일군의 미술가들을 설득하여 하나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켰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를 발표한다. 그의 비평이 방향을 바꾸어 60년대 새로운 논쟁들을 만들어 낸다. 

 

4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기술적 용어들을 만들어 왔다. 이 용어들을 통해 매우 정교하면서 탄탄한 방식으로, 자신이 옹호했던 전후 미술에서의 새로운 양상들을 설명해 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면적(allover)'이라는 개념이다. 이 용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 특히 잭슨 폴록의 회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촘촘한 그물망과도 같은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표면의 균일함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젤 회화" 개념과 대비시켰다. 즉 이젤 회화가 캔버스 너머로 극적인 서사가 펼쳐지는 무대와 같은 삼차원의 환영을 만들었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전면적인 표면은 평면성, 정면성, 그리고 서사의 부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가 미술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자신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언급한 "전복적이고 미래주의적"일뿐인 입장을 내세우게 됐으나, 그에게 미술은 이와는 반대로 회화적 전통을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하는 작업이 돼야 했다. 이런 관점이 바로 그의 가장 유명한 글 「모더니즘 회화」(1960)의 기본 골자이다. 

 

권한 영역

그린버그는 예술에 있어서 권한 영역, 즉 서로 다른 각각의 미학 분과들 고유의 이 영역은 각 매체가 지닌 유일무이한 성격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각 개별 예술은 다른 매체로부터 차용한 전통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역사화의 서사는 문학에서, 환영주의 회화의 공간감은 연극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1860년 마네의 회화에서 시작된 이 논리는 회화의 유일무이한 특징이 화면 그 자체의 평면성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그는 「모더니즘 회화」에서 아방가르드는 미술의 적으로 간주했다. 

 

막후 인물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가 문화적 가치의 옹호자에서 적대자로 바뀌게 된 것을 '네오다다'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네오다다'는 아방가르드가 일찍이 벗어나 있었던 상업적인 영역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더니즘의 기획을 저속하고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받아들인 재스퍼 존스의 작업을 비난하면서, 그것은 "실제로는 단지 복제될 수 있을 뿐인 평평하고 인위적인 형태를 재현함으로써 얻어진 문학적 아이러니"로서 형식적이거나 조형적인 관심이 아닌 신문 잡지 류의 관심에서 나온 것이라 언급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회화가 레디메이드의 논리에 오염돼 모더니즘이 위협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만약 평면성과 그것의 한정이 회화의 본질을 구성하는 두 가지 법칙이라면 "늘려져 있거나 벽에 걸린 캔버스도 이미 하나의 그림으로 존재하게 된다"(레디메이드) "그것이 비록 성공적인 그림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젊은 세대의 비평가 중 그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마이클 프리드는 이런 생각을 심화시켰다. 1967년 그는 "벽에 걸린 텅빈 캔버스가 '반드시'성공적인 그림이 아니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라면서, "내 생각에 그것은 그림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리드와 그린버그의 입장은 두가지 결과로 이어졌다. 우선 60년대 후반 색면회화와 '시각성'은 그린버그가 일찍이 과학적인 질서를 통해서 찾아낼 수 없었던 미학적 질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 모더니즘의 논리는 다른 쪽에서는 지지체의 즉물적이거나 물리적인 본성으로의 환원(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거나 미술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이라는 동어반복적인 미술 관념(개념 미술의 몇몇 형태들에서처럼)을 만들어 냈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이 회화에 만화와 광고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제인스 로젠퀴스트나 에드 루샤 등이 그 뒤를 따른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렇게 탄생한다.

 

 

리히텐슈타인, 「차 안에서」, 1963년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의 작품은 산업적으로 생산된 레디메이드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계 복제(만화), 수작업(드로잉), 다시 기계 복제(투영기), 다시 수작업(복제와 채색)이란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수작업과 기계 작업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회화적인 것과 사진적인 것을 교묘하게 뒤섞은 미술가로 앤디 워홀, 리처드 해밀턴, 제임스 로젠퀴스트, 에드 루샤, 게르하르트 리히터, 지그마르 폴케 등이 있는데, 이들의 작업은 전성기 팝아트의 핵심을 이룬다. 

리히텐슈타인의 벤다이 점은 꽤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외형은 기계 복제의 무수한 변형을 거쳤다는 점, 그리고 실재는 어떻게든 "매개되며(mediated)" 모든 이미지는 어떻게든 "걸러진"(screende) 다는 점이다. 

 

영사하기와 스캐닝

 

팝아트의 급진성은 저급한 내용과 고급 형식이라는 주제의 대립보다는, 구조상 일상적인 기호와 숭고한 회화의 속성 모두를 띠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레오 스타인버그는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콜라주-회화 작품에서 또 다른 패러다임을 감지했고 그것을 "평판(flatbed)화면"이라 불렀다. 여기서 회화는 더 이상 자연 풍경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는 수직적인 틀이 아니라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하나의 텍스트로 짜여진 수평적 장소, 즉 "정보를 나열해 기록하는 평면"이 된다. 스타인버그가 보기에 모더니즘 회화 모델과 단절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알리는 이 패러다임은 리히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은 벤데이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모더니즘 회화 모델의 한 변형임을 분명히 했다. 그에게 회화는 걸러진 이미지였고,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기계 복제와 전자 시뮬레이션의 과정을 거치는 전후 세계에 대한 하나의 기호였다. 이런 걸러져 보이는 과정은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실제의 과정(손으로 만든 것과 레디메이드를 뒤섞는)과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현대 세계의 이미지는 대개 매개된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보는 방식과 그리는 방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이미지는 영사된 상태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읽기와 보기 행위는 모두 일종의 '스캐닝'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각적이건 비시각적이건 간에 이런 방식으로 정보를 수용하도록 훈련된다. 우리는 정보를 스캔한다.(그리고 떄로는 정보가 우리를 스캔한다. 우리가 두드린 자판이나 클릭한 웹 사이트의 조회수에는 우리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일지감치 리히텐슈타인은 이런 전환을 감지했던 듯하다. 연재만화에 잠재돼 있었던 이미지의 외양은 물론,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일어난 전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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