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시대의 미술
파레르곤, 대체보충, 차이, 재표시 등의 용어들이 모더니즘 이후의 새로운 미술 실천의 바탕이 됐다. 허상과 해체 등 이 모든 생각들이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의 원칙이 됐다.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 데이비드 살르는 미술이 대중문화의 조건을 초월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강도 높게 비판했던 청년 미술가들과 동일한 맥락에 있었다. 로버트 롱고, 신디 셔먼, 바버라 크루거, 세리 레빈, 루이즈 롤러 등 일군의 청년 미술가들은 20세기 말 정보문화가 초래한 현실과 그 재현 사이의 역전된 관계에 주목했다.
재현은 현실 이후에 등장해 현실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 앞서 현실을 구축한다. 우리의 '실재' 정서는 우리가 영화에서 보거나 대중 소설에서 읽은 정서를 모방한다. 우리의 '실재' 욕망은 광고 이미지에 의해 구조화된다. 우리 정치의 '실재'는 지도자에 대한 텔레비전 뉴스나 할리우드 시나리오에 의해 미리 제작된다. 우리의 '실재' 자아는 우리의 것이 아닌 서사가 엮어 낸 이런 모든 이미지들의 덩어리이자 반복이다.
일군의 미술가들은 재현이 재현의 지시 대상(재현이 복제한다고 여겨지는 실재 세계의 사물)에 앞서는 이런 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은 이미지 문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질문들, 즉 기계 복제되는 이미지 문화의 토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 문화의 기능, 원본 없는 복제인 이미지 문화의 지위 등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초기에 수용한 비평가 더글러스 크림프는 이 작업들을 '그림들(Pictures)'이라고 명명했다. 예컨대 신디 셔먼은 '자화상' 연작을 통해 자신의 자아가 자아에 앞서는 '그림', 즉 원본 없는 사본에 의해 언제나 매개되고 구축된다고 말했다. 후기구조주의 이론에 능통한 크림프 등의 비평가들이 이런 작업에서 확인한 것은 작가성, 독창성, 유일성 개념 같은 제도화된 미술 문화의 주춧돌에 대해 진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실재' 작가가 사라지는 끝없이 아득한 인용의 지평선을 창조한 셔먼의 사진들 속에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가 50~60년대에 "작가의 죽음"이라고 분석했던 것이 반영돼 있음을 보았다.
셰리 레빈의 작업도 이런 동일한 맥락 안에 있었다. 엘리엇 포터, 에드워드 웨스턴, 워커 에번스의 사진을 재촬영해 '자신의' 작품으로 제시한 레빈은 이런 도용 행위를 통해 이미지에 권위를 부여하는 위의 인물들의 지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도전에 깃든 암묵적인 전제는 '원본' 사진(웨스턴이 자신의 어린 아들 닐을 찍은 누드 토르소 사진, 포터의 거친 테크니컬러 풍경 사진)도 이미 언제나 그 자체로 도용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즉 이 사진들은 우리 눈에 이미 익숙해진 거대한 이미지 도서관(그리스 고전 토르소 조각, 바람 부는 시골의 그림 같은 풍경)에서 무의식적이지만 필연적으로 빌려온 이미지라는 것이다. 작가성과 독창성이라는 전통적인 착상에 대한 이런 종류의 근본적인 거부는 적법한 범위를 벗어난 까닭에 비판적인 태도를 띨 수밖에 없으며 '차용 미술'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소유권 형식과 사생활 보호의 허구에 대해 비판한 이런 유형의 작업은 급진적인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여겨졌다.
(▶관련글:1977년 포스트모더니즘적 그림(picture))
이렇듯 광범위하게 실천된 80년대의 이미지 '차용'의 전술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현실을 통해 직조되는 동시에 이미 현실을 구조화하는 권력 네트워크에 대한 비판으로 보고 급진적인 진영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구상 및 이미지 증여자로서의 미술가를 향한 열광적인 회귀로 보고 보수적인 진영에 두어야 할지)는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입장에서 그 전략을 바라볼 때 또 다른 차원을 띠게 된다. 광고가 빈번히 사용하는 직접적인 전달 방식도 작업에 도입한 바버라 크루거는 미적 담론의 전제조건과 제도적 틀에 젠더의 틀을 더 추가한다. 미술가와 관람자 사이에 암암리에 가정된 이 틀에 따르면 미술가와 관람자는 모두 남성이다. 크루거는 고전적인 여성 조각상을 배경으로 스타카토 식으로 메시지를 나열한 「당신의 시선이 나의 뺨을 때린다」(1981) 같은 작품에서 이런 가정을 드러내며 그 전제조건적 틀 이면의 모습을 채워 넣는다. 즉 사실은 남성으로 전제된 두 항('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소위 언제나 침묵하는 파트너인 여성의 상징적 형식에 의해 작동되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젠더에 대한 후기구조주의 언어학의 분석을 따르는 크루거의 작업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말해지는 주체인 여성에게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에서 크루거는 브로타스가 공개편지를 통해 했던 것처럼 말할 권리를 거머쥐지 않고 '차용'을 선택한다. '의미의 운반자'로서 여성은 '자연', '미', '모국', '자유', '정의'처럼 끝없이 나열된 추상 개념들이 들어선 자리이며, 이런 모든 추상 개념들이 문화적이고 가부장적인 언어의 장을 형성한다 여성은 진술이 성립되는 의미의 저장고이다. 한 명의 여성 미술가로서 크루거는 그녀의 발언을 '빼앗고' 결코 '의미의 제작자' 행세를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항에 해당하는 이런 위치를 폭로한다.
여성이 언어의 상징적 영역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그 영역에서 구조적으로 발언권을 뺏긴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이런 문제는 다른 주요한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작업에 사용되는 매체가 됐다. 메리 켈리는 「산후 기록」(1973~1979)에서 자신의 갓난 아들이 성장하는 5년 동안의 모자 관계를 기록한 135개의 전시물을 통해 자신이 아이와 맺은 고유한 결합의 궤적을 그린다. 이 기록은 남자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고 자율성을 발달시킴에 따라 여성이 체험하게 되는 어긋남의 과정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어머니가 박탈감을 느끼면서 아이를 물신화하게 되는 방식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관련글:1975년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미술가들)
21세기를 전후해 미적 체험의 영역은 두 종류의 부재로 그 구조가 결정된다.
첫째는 현실 자체의 부재일 것이다. 현실 자체는 미디어의 신기루 같은 스크린 뒤로 물러서고, 텔레비전 모니터의 진공관에 잠식당하고, 다국적 컴퓨터 통신의 수많은 출력 정보와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둘째는 언어와 제도의 전제조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표면상의 부재일 뿐이며 그 배후에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메리 켈리, 바버라 크루거, 신디 셔먼부터 한스 하케, 다니엘 뷔랭, 리처드 세라까지 여러 미술가들이 이 두 번째 부재를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 > 서론과 라운드테이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론] 4-2.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자크 데리다) (0) | 2019.11.01 |
---|---|
[서론] 4-1. 후기구조주의(전제조건, 제도적 틀) (0) | 2019.10.31 |
[서론] 2-2. 예술사회사의 모델과 개념 (0) | 2019.10.28 |
[서론] 2-1. 예술사회사의 모델과 개념 (0) | 2019.10.27 |
[서론] 1. 모더니즘 미술과 정신분석학 (0) | 2019.10.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