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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서론과 라운드테이블

[서론] 4-2.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자크 데리다)

by 책방의 먼지 201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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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두 강연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방브니스트와 푸코가 밀어붙인 구조언어학을 취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후기구조주의를 만들어 냈다. 데리다는 구조주의 자체의 어휘를 사용해 논의를 시작했다. 구조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짝짓기로 이루어지는데, 기표의 단순한 물질적 형태(음성이나 문자로 표현된 고, 양, 이) 보다 특권적인 것은 바로 기의(한 마리의 고양이나 '고양이'의 관념 같은 지시 대상이나 개념)이다. 이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즉 고,양.이 가 반드시 '고양이임'을 의미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으며, 다른 문자의 조합도 이에 못지않게 '고양이임'을 의미할 수 있다. '고양이'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가 다른 언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프랑스어 chat, 이탈리아어 gatto, 독일어 katze등) 

그러나 언어의 핵심에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평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구조주의 모델에는 '젊은(young)/나이 든(old)'이나 '남자(man)/여자(woman)' 같은 이항대립의 항 사이에도 불평등이 있다. 이런 불평등은 표시된 항과 표시되지 않은 항 사이에 존재한다. 대립하는 두 항 중 표시된 항은 표시되지 않은 항보다 더 많은 정보를 발화하게 된다. 예컨대, '젊은/나이 든'이라는 이항과 "존은 메리만큼 젊다."라는 진술을 보자. 여기서 "~만큼 젊다."는 젊음을 함축하는 반면, "존은 메리와 동갑이다."는 젊음도 늙음도 함축하지 않는다. 더 높은 차수의 단어 합성에 가장 쉽게 어울리는 항이 표시되지 않은 항인데 이는 '남자/여자'를 살펴보면 명백해진다. 이 두 항 중에서 표시되지 않은 항은 인류, 의장, 연설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이다. 

표시되지 않은 항은 자신의 대립항을 지나쳐 더 큰 일반성을 갖게 되기 때문에 암묵적인 권력을 갖게 되고, 따라서 외관상 중립적인 이항 대립의 구조에 위계가 생긴다. 데리다는 이런 무언의 불평등을 방관하지 않고 표시되지 않은 항을 '표시'하기로 결심했다. 개인을 가리키는 일반대명사로 '그녀'를 사용했으며, '그라마톨로지'를 이론화하면서 기의보다 기표에 우월한 위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듯 표시되지 않은 것을 표시하는 행위를 뜻하는 데리다의 '해체'는 오로지 구조주의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는 전복 행위이다. 해체는 구조주의의 틀에 주목해 그 틀에 틀을 씌우고자 한다. 

 

데리다의 영향력 있는 저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1967)는 표시되지 않은 것을 표시해 보이지 않는 틀을 보이게 만드는 해체 활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말한다."의 지위를 "그는 쓴다"의 지위와 비교하면, "말한다"가 표시되지 않은 항이며 "쓴다"는 표시된 항임을 알 수 있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목소리(로고스)를 표시해 이런 위계를 전복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글쓰기보다 우월하게 된 원천도 분석한다. 데리다는 자신의 박사 논문 「목소리와 현상」에서, 글쓰기가 사유의 투명하고 직접적인 모습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폄하한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이론을 분석했다. 그리고 데리다는 기억 흔적의 폄화된 기호(글쓰기, grammé)보다 특권적인 대우를 받는 로고스에 대해 분석하면서 이른바 대체보충의 논리를 전개시켰다. 대체보충이란 인간의 능력을 보조하거나 확장하거나 보충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반어적이게도 결국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게 된 보충물을 뜻한다. 이런 위계는 데리다가 만든 차이(différance)라는 용어의 배후에도 존재한다. 차이 자체는 언어의 기반으로 간주되는 차이와 청각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문자로 쓰인 형태를 통해서만 지각될 수 있는 차이가 지시하는 것은 바로 흔적과 단절 또는 간격을 트는 글쓰기의 활동으로서, 이를 통해 기호가 서로 분절되기 시작한다. 간격을 트는 이 활동에 의해, 언어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기표들 사이의 차이의 유희(예를 들어, 'cat'이 하나의 기호로 기능하고 언어 체계에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오직 'cat'과 'bat'과 'car'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가 시작될 뿐만 아니라, 기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기 시작한다. (의미는 한 문장이 점진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차이는 차이를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간 속에서 지연을 만든다.   

 

칸트는 작품의 논리가 작품 내부에 있으며, 작품 외부의 것(파레르곤)은 그저 상관없는 장신구일 뿐이며 마치 그림의 액자나 건물의 기둥처럼 단순한 군더더기나 장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데리다의 주장을 보면, 미적 판단을 자립적인 것으로 파악한 칸트의 분석은 그 자체로 자립적이지 못하며, 이전의 저작 「순수이성 비판」(1781)에서 초월적 논리를 세우기 위한 인식의 틀을 들여와서야 이루어진다. 따라서 틀은 작품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서 도입돼 내부를 내부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틀의 파레르곤적인 기능이다.

아마 데리다가 가장 능수능란한 방식으로 틀에 다시 틀을 씌운 사례는 그가 1969년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98)의 작품에 관해 행한 두 차례의 강연 원고인 「두 강연」일 것이다. 이 논문의 첫 페이지는 기표의 지위에 관한 데리다의 거의 모더니즘적인 감수성을 보여 주는데, 이는 구조주의의 '진리들'에 관한 이 후기구조주의의 꼼꼼한 검토와 상통하는 것이다. 마치 모더니즘의 모노크롬 회화처럼 빽빽한 회색 글자들로 가득한 그 페이지는 미메시스 이론을 다루는 플라톤의 대화편  「필레보스」의 한 페이지를 옮긴 것이다. 그 회색 바탕의 우측 하단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글은 역시 미메시스 사상을 다룬 말라르메의 「마임극」이다. 

「두 강연」에서 데리다는 플라톤과 말라르메가 미메시스를 정의할 때 동원하는 숫자들의 물질적 조건을 가지고 유회한다. 플라톤의 정의는 숫자 4에 의존하고, 말라르메의 정의는 숫자 2에 의존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플라톤의 숫자 4를 물질화해 그것을 하나의 틀로 이해한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은 영혼이 자아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를 모방한다. (2)책의 가치는 책 안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책이 모방하는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3)책의 진리는 책이 행하는 모방의 진실성에 기반을 두고 결정할 수 있다. (4)책의 모방은 분신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은 단일한 것의 분신을 만드는 일이고 종결될 수 있으므로 진리의 활동 안에서 성립된다. 다른 한편, 말라르메의 모방은 이미 둘 이상인 것의 분신을 만드는 일이므로 종결될 수 없는 '둘-사이'다. 말라르메가 「마임극」에서 다루는 공연의 내용은 아내 콜럼바인의 간통을 알아챈 피에로가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피에로는 체포되지 않기 위해서 독살, 교살, 총살 등의 확실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이런 방법들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낙담에 빠져 돌부리를 걷어찬 피에로는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발을 어루만지다가 무심코 자신을 간질이게 된다. 맥없이 웃다가 그는 콜럼바인을 죽도록 웃기면 그녀가 웃으며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마임극에서 시도되는 살인은 한 배우의 1인 2역으로 구현된다. 즉 한 명의 배우가 악착같이 간질이는 사람의 역할과 경련하고 괴로워하고 웃으면서 몸부림치는 희생자의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그런 죽음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방은 단일한 것을 모방한다기보다는 다수인 것을 모방한다. 이런 모방은 그 자체로 기표의 순수한 활동이며, 실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발화의 전환("웃으며 죽기"와 "죽도록 웃기")이다. 말라르메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장면은 욕망과 성취, 범행과 그 기억 사이의 음란하고도 성스러운 결혼 속에서 생각만을 묘사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현재의 허위적인 모습 아래서 미래를 예견해 보고 과거를 회상해 보는 식이다. 마임 배우는 이런 식으로 연기한다. 배우의 유희는 끊임없는 암시에만 머무를 뿐 거울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배우는 순수한 허구의 환경을 확립한다." 

따라서 이미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것에 대한 모방은 진리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는다. 이런 모방은 원형 없는 사본이며, 허상(시뮬라크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상이란 원본 없는 사본이며 "현재의 허위적인 모습"이다. 플라톤과 말라르메는 플라톤의 틀을 말라르메의 이중성(둘-사이)으로 변화시키는 간격을 한 권의 책 안의 간격이나 여백에 빗대어 설명한다. 말라르메는 책의 그 틈새에 착안해 꾸준히 책에 성별을 부여했고 "음란하고도 성스러운"이라고 표현했다. 데리다가 결혼(hymen)이나 때로는 "함입(invagination)"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간격("현재의 허위적인 모습")이다. 이를 통해 틀의 조건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지고, 그 틀의 조건에 틀을 씌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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