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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서론과 라운드테이블

[서론] 4-1. 후기구조주의(전제조건, 제도적 틀)

by 책방의 먼지 201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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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권리를 거머쥠으로써 말해지는 자로서의 종속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권력의 분리를 지탱하는 제도적, 사회적 분할에 도전하는 이런 태도는 학생 정치 외에 다른 곳에서도 힘을 얻었다. 인문과학이라고 통칭되는 다양한 학문 분과의 전제와 가정이 재평가의 대상이 됐고, 이런 움직임은 1968년 무렵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로 결집됐다.

 

'무사심'은 없다

구조주의는 한 사회의 언어 체계나 친족 체계 같은 모든 인간 활동을 하나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체계로 보았다. 그 체계는 비교적 자율적이고 스스로 유지되는 구조이며, 그 체계의 법칙은 상호대립이라는 특정한 형식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간주됐다. 이처럼 심지어 조직되는 과정 중에도 체계 자체에 주어진 재료들만을 통해 형식적이고 재귀적인 방식으로 정돈되는 자기 규제적인 구조에 대한 사상은 각각의 다양한 예술 분과나 매체에 대한 모더니즘 사상과 명쾌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평행 관계가 성립하는 한, 1968년의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투쟁은 70~80년대 미술의 전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후기구조주의는 각각의 체계가 자율적이며 체계의 규칙과 활동은 해당 체계의 경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구조주의의 전제를 거부하면서 성장했다. 언어는 단지 메시지 전달이나 정보 소통을 위한 재료일 뿐만 아니라 대화자에게 대답해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언어 행위의 수신자에게 어떤 역할, 어떤 태도, 어떤 전체적인 담론 체계(코드화와 탈코드화의 규칙뿐만 아니라 행동과 권력의 규칙까지)를 부과한다. 따라서 주어진 언어 교환의 내용과는 별개로, 언어 교환의 성립이란 그 교환의 제도적 틀 전체를 수용(또는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8년 초 언어학을 공부하던 오스왈드 뒤크로는 그 제도적 틀을 "전제조건"이라고 불렀다. 

자율적인 학문 분과나 예술 작품은 자신의 틀이 반드시 자신의 바깥에 놓인 비본질적인 부가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수행적인 언어 개념은 틀이 언어 행위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언어 교환이란 애초부터 그 교환의 수용자에게 전제조건 전체를 부과하는(또는 부과에 실패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 행위는 어떤 메시지의 단순한 전달 이상의 것이다. 언어 행위는 권력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며, 수신자의 말할 권리를 변경하기 위한 수단이다. 

 

틀에 도전하기

60년대에 등장한 이런 언어관의 변화를 누구보다 앞서 이끈 이는 프랑스 구조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1902~1976)였다. 그는 언어 교환의 유형을 서사와 담론으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고유한 특색을 설명했다. 서사는 전형적으로 삼인칭을 사용하며 과거시제 형식만을 허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생생한 의사소통을 뜻하는 방브니스트의 용어인 담론은 전형적으로 현재시제 및 일인칭과 이인칭을 사용한다. 따라서 담론의 특징은 전달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안에 송신자 수신자가 반드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196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통해 이런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푸코가 방브니스트의 '담론'이라는 용어를 적용시킨 대상은 늘 중립적인 소통으로 여겨지던 학문적 정보였는데, 이 정보는 주어진 한 학문 분과 내에 담긴 것이었으며 '객관적으로' 전달된 정보로 여겨져 왔다. 여기서 푸코는 상반된 입장을 취하며 '담론'이 언제나 권력 관계와 힘의 행사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지식은 한 분과의 자율적 내용이기를 그치고 이제 훈육적인 것, 즉 권력의 활동이 된다. 따라서 푸코의 '담론'은 , 마치 교실이나 경찰서에서 작동되는 권력 관계처럼 언어 행위를 제도적으로 재단하는 담론의 틀을 폭로하는 것이다. 

 

'제도 비판'이라는 이름을 지닌 모든 실천이 문화의 중립적인 담지자로 여겨지는 것들에 주목해 그 중립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작됐다. 예컨대 프랑스 미술가 다니엘 뷔랭은 틀이 전제조건들이  슬그머니 숨어 있지 못하게 하여 제도적 틀의 권력에 도전했다. 70년대에 등장한 그의 작업은 권력의 작동을 보장하는 모든 구분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973년 뷔랭은 「틀의 안과 밖」을 전시했는데 회색과 흰색 줄무늬가 들어간 19개의 천을 매달아 만든 작품이었다. 작품의 제목이 가리키는 틀은 분명 갤러리의 제도적 틀로서, 이 틀은 갤러리가 보유한 대상들의 특정한 성질을 보증해 준다. 희소성, 진정성, 독창성, 유일성 같은 이 특정한 성질들은 갤러리 공간이 암묵적으로 옹호하는 작품의 가치이기도 하다. 이런 가치들은 희소성, 독창성, 유일성을 지니지 않은 우리 문화의 다른 대상으로부터 예술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그 문화의 한 자율적 체계로서 내세운다. 

그러나 희소성, 유일성 등은 갤러리가 특정한 가격을 매겨 놓은 가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갤러리가 판매하는 것과 다른 상업 공간의 상품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사라진다.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차양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줄무늬 그림들이 갤러리의 틀을 돌파해 그 경계 너머 창문 밖까지 나가 버렸을 때, 뷔랭은 관람자에게 이 그림들이 어느 지점에서 '회화'(희소성, 독창성 등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깃발, 널어놓은 시트, 개인전 광고, 사육제 장식천 같은 다른 대상들의 체계에 속하게 되는지 결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즉 뷔랭은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체계의 권력이 지닌 적법성을 시험했던 것이다.  

 

다니엘 뷔랭, 「틀의 안과 밖」의 자료 사진 일부, 1973

 

또한 풍경(자연적 장소)와 풍경의 미적 담지자('비장소') 사이의 관계를 다룬 로버트 스미스슨 작업의 핵심부에도 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비장소」라는 이름의 연작에서 스미스슨은 특정한 산지의 광물을 기하학적 모양의 상자에 담아 갤러리 공간으로 가져왔다. 각각의 상자는 광물 표본의 원산지를 표시하기 위해 벽에 붙인 지도의 부분들과 똑같은 형태를 지닌 까닭에 그 지도와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기하학적 상자가 광물을 하나의 가호로 만들어 광석의 채굴지와 광석 자체를 '대표'하게 함으로써 자연을 예술화하고 실재를 실재의 재현으로 탈바꿈시키는 이 명백한 행위, 이것이 바로 스미스슨이 갤러리, 미술관, 미술 잡지 같은 미술계 공간의 체계에 위탁한 일이다. 

스미스슨의 상자와 지도에서 보이는 지구라트를 닮은 구조는 어쩌면 그의 미술의 이런 측면이 단지 일종의 반어적인 형태 놀이에 불과할 뿐임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점점 줄어드는 상자들은 풍경에서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자연사, 즉 처음엔 풍부했던 채굴량이 점점 줄어들어 결국 공급이 중단되는 연속적인 단계도 말해 주고 있다. 형식, 미, 자기 지시 등 자연사와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합의된 미술계 담론의 틀 안에서 재현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런 자연사였다. 그러므로 스미스슨의 전략은 다른 낯선 재현 방식을 갤러리의 틀 안으로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의 재현 방식을 택했다. 사실 자연사 박물관에서 광석과 상자와 지도는 비범한 예술적 추상이 아니라 '실재'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전혀 다른 지식 체계의 기본 요소이다. 

 

▶ 로버트 스미스슨, 「비장소(뉴저지 프랭클린)」, 1968

: 스미스슨의 「비장소」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디오라마와 관련이 깊다. 자연사박물관의 자연계 견본들은 전시물로서 미술관에 수입되어 필연적으로 미적 공간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 이 작품의 상자는 도널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 같은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적극적으로 부인했던 유미주의가 오히려 미니멀리즘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고발하며 미니멀리즘에 대해 반어적인 방식으로 논평한다. 

 

 

 

 

 

 

 

 

 

 

 

 

 

그러므로 미적 담지자에서 벗어나고, 제도적 틀의 굴레를 끊고, 미술계의 전제조건이 확립한 가정과 암묵적인 권력 관계에 도전하려는 70년대의 이 모든 노력은 특정한 장소들(갤러리, 미술관, 채석장, 스코틀랜드 고지대, 캘리포니아 해안)과 관련해 진행됐고 미술 작품이 이 장소들에 다시 틀을 씌우는 기능을 맡았다. 다시 틀을 씌운다는 것은 일종의 특이한 반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장소들이 (눈에 안 띄게 슬그머니) 틀을 씌우던 예전의 미적 관념들이 이제는 풀려난 유령들처럼 실재의 장소들 위에서 맴돌게 됐고, 장소 자체(흰 벽, 신고전주의 주랑, 아름다운 황무지, 굽어진 언덕, 노출된 암석들)는 새로운 종류의 재현을 위한 물질적 토대가 됐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재현은 제도적 틀 자체의 이미지였으며, 마치 새로운 종류의 강력한 현상액이 비활성의 사진 원판에서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정보를 내놓은 것처럼 이제 제도적 틀이 눈에 보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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